독박돌봄은 타인의 돌봄에

무임승차하는 문제이자

돌봄기피 용인하는 시스템 문제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 돌봄을 담당했던 여성과 노예의 참여는 없었다. 남성 시민만 참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반문하진 않았다. 당사자들의 불참은 그들의 배제가 부당한지 여부를 논의할 공적 기회마저도 박탈했기 때문이리라. 이제 민주주의는 달라졌을까? 여성도 유아차를 끌고 광장에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은 여전히 평등하게 돌보지 못하며, 돌봄으로 인한 여성의 정치 참여 배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여성주의 정치 철학자 조안 트론토는 돌봄과 민주주의를 동전의 양면으로 본다. 돌봄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이 사실 사적영역의 여성의 돌봄이 있어서 가능함을 폭로했다. 마찬가지로 멋있게 차려입고, 의사결정을 하는 국회의원들도 누군가의 돌봄에 무임승차하면서 민주주의를 움직여간다면? 돌봄에 무책임한 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이 과연 민주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트론토 논의 가운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흥미롭게 받아들일 통찰력 한 가지는 누군가 돌봄책임에서 배제되면서 특권을 누릴 때 누군가는 독박돌봄의 고통을 당한다는 점이다. 독박돌봄은 우리사회에 타인의 돌봄에 무임승차하는 문제 그리고 이를 불가피하게 만들거나 돌봄기피를 용인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이며, 사회 전체가 뼈아프게 성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돌봄총량 불변의 법칙은 어떨까. 누군가는 차려야 하는 밥상, 해야 하는 설거지, 청소, 빨래 등.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돌봄의 양은 정해져 있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내 몫을 대신해주어야 한다. 문제는 돌봄 받는 사람은 유능하고 부유한 사람, 돌봄 하는 사람은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고 보는 사회적 편견이다. 여성/남성, 고소득/저소득, 젊은 사람/나이 든 사람, 한국인/이주민 등 다양한 집단 가운데 누가 돌봄을 할까 묻는다면, 대부분 여성/저소득/노인/이주민이라고 답한다. 돌봄을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하는 일로 여기는 문화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낮은 보수로, 낮은 보상으로, 열악한 평판과 조건에서 돌봄을 해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성평등 문제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렵게나마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밥상 차리기, 청소, 빨래, 양육 등 우리의 노력과 시간을 실제 투자해야 하는 실천적 책임으로서의 돌봄을 회피하는 문제는 아직 중요한 의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함께 돌보는 사회’, ‘어느 누구도 돌봄에 무임승차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요원하게 들린다. 오히려 이제는 남성 뿐 아니라 젊은 여성들마저도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돌봄책임을 최소화 한 무임승차형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학생들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돌봄책임, 돌봄욕구 모두를 최소화 하고 자기계발에 시간을 쏟는다.

미국의 데보라 스톤이 쓴 돌봄운동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다. 물과 공기가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 중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언젠가 우리 생존이 위협당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돌봄도 물과 공기만큼 우리 삶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돌봄을 깔보다간 언젠가 돌봄결핍의 위기가 오고 나서야 모두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의 돌봄책임에 무임승차 하는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돌봄의 중요성을 알리는 운동이 필요하다. 각자 돌봄의 몫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사회, 함께 돌봄이 가능한 삶의 조건을 중요한 정책의제로 삼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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