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이라는 시대적 염원을 담아 대안으로서 세상에 나온 ‘여성신문’이 창간 30주년을 맞았습니다. 1988년 12월 2일 창간호를 시작으로 30년간 한 호의 결호도 없이 이어져온 여성신문의 역사는 한국 여성의 30년사이자 한국 여성운동의 30년사입니다. 1988년부터 2018년 여성신문이 보도한 사건 가운데 사회를 뒤흔들고 제도 개선의 디딤돌이 된 이슈 30건을 통해 여성들의 투쟁과 쟁취의 역사를 돌아보고 내다봅니다. <편집자주>

 

97년 ‘부모 성 함께 쓰기’

여성신문 기자들도 동참

시민연대 발족 참여 등

2005년 호주제 폐지까지

가열찬 보도로 적극 지원

호주제 잔재는 여전

민법상 ‘부성주의 원칙’ 등

제도 보완·인식 전환 필요

 

2005년 3월 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복도는 여성들의 우렁찬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이날 성차별의 상징이었던 ‘호주제’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찬성 161표, 반대 58표, 기권 16표. ‘권위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평등한 사회’로 가는 여성계 50년 숙원이 이뤄진 순간이다.

호주제는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의 출생, 혼인, 사망 등 신분 변동을 기록하는 신분등록제로 일제 강점기 때 도입됐다. 수십년 간 대표적인 성차별 제도로 인식돼왔으며 재혼 가족, 한부모 가족, 입양 가족 같은 다양한 가족의 존재를 막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호주제 폐지는 1950년대부터 계속된 여성운동의 결정판이다.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지면을 통해 호주제 폐지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본격적인 호주제 폐지 운동의 첫 장은 1997년 3월 9일 제13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이뤄졌다(1997.3.21. 417호). 여성계 원로인 이효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대회 폐회 직전 ‘부모 성 함께 쓰기’를 선언했다. 이이효재, 조한혜정, 고은광순, 김신명숙 등 여성계 지도자 170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태아 성감별에 의한 여아 낙태의 심각성을 통탄하며 남아선호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한 문화운동이자 호주제 폐지를 요구하는 가족법 개정 운동의 일환이었다. 여성신문 기자들도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에 동참하며 기명 기사에 부모 성을 함께 쓴 4자 이름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신문은 운동 확산을 위해 운동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전문가 칼럼을 연속으로 실었다. 페미니스트 언론인 김신명숙의 ‘초등생 수준의 딴죽 걸기’(418호)를 시작으로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의 ‘모계를 공식적인 부모로 살려내자’(420호), 이효재 대표의 ‘종손원죄 아들종교에 볼모잡힌 한국의 성씨 제도’(423호) 등은 운동의 새롭고 대안적인 성격을 널리 알리는 주력했다.

 

1984년 8월 30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의 가족법 개정을 위한 가두캠페인 서명을 받는 이태영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과 직원, 회원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1984년 8월 30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의 가족법 개정을 위한 가두캠페인 서명을 받는 이태영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과 직원, 회원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호주제 폐지 운동의 신호탄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고 이태영 박사가 쏘아 올렸다. 이태영 박사는 1948년 구성된 제헌의회가 그해 제정한 가족법이 헌법에 명시된 남녀평등을 따르지 않고 성인 여성을 미성년자와 똑같이 무능력자로 규정하는 등 성차별이 심각한 것을 깨닫고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한다. 이후 차명희 전 이사장, 곽배희 소장이  뜻을 이어 받아 호주제 폐지 운동을 지속했다.

곽배희 소장은 “50년 동안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며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국민들의 의식전환을 위한 설득, 교육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지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던 유림 측을 상대하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성균관 유림은 1984년 8월 전국 231개 향교에서 올라온 1000여 유림과 ‘동성동본금혼법 및 호주제도 수호 궐기대회’를 여는 등 지속적으로 가족법 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2003년 민법개정안 확정에 앞서 열린 여성부와 법무부의 공동 공청회는 호주제 존치론을 앞세운 ‘정통가족수호범국민연합’ 측 방청객의 무차별적인 고성과 욕설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성단체와 호주제 폐지에 앞장선 여성들은 이러한 보수세력의 욕설이 담긴 편지와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여성계는 호주제 존치를 주장하는 유림 세력의 거센 반발에도 뚜벅뚜벅 호주제 폐지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오랜 관습을 바꾸기 위해선 국민의 동의와 지지는 필수적이다. 여성계가 연대 활동에 박차를 가한 것도 이때 부터다. 먼저 2000년 9월 137개 여성·시민사회단체가 모여 ‘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를 발족시켰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중심으로 ‘호주제 위헌소송’ 준비도 시작했다. 진선미 변호사와 이정희 변호사, 조숙현 변호사, 김수정 변호사 등이 소송인단에 참여했다.

결국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는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을 규정한 헌법에 위배된다”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50여년에 걸친 투쟁 끝에 민법 안에서 호주제 관련 규정이 삭제됐다. 2008년부터 1인 1적을 원칙으로 한 새로운 신분등록제가 시행되면서 남성이 우선 호주가 될 수 있어 어린 아들, 손자가 어머니, 할머니의 호주가 되고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어 가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사라졌다. 호적 대신 개인별 신분등록제도도인 1인 1적제가 도입됐고, 대물림을 위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도 벗어났다.

 

2005년 3월 호주제 폐지가 확정되자 여성계 인사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2005년 3월 호주제 폐지가 확정되자 여성계 인사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곽 소장은 “호주제 폐지는 수직적인 가족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어 성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족관계를 만드는 토대를 마련했다”면서도 “호주제로 인해 만들어진 성불평등한 조항이 60~70% 사라졌으나 아직도 성평등, 부부평등으로 가기 위해선 남아있는 과제가 산적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호주제의 잔재인 자녀의 성과 본의 문제, 부부재산 관계, 비혼모의 법적 지위 문제 등을 법 개정 운동을 통해 바꿔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호주제가 사라지고 가족관계등록제도가 시행된 지 10년이 흘렀다. 가부장제를 유지시키는 호주제는 법 조문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일상 속에서는 살아 숨쉬고 있다. 여성신문은 호주제로 인해 뿌리내렸던 많은 법·제도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갔다. 특히 ‘부모가 결정한 내 성, 성평등한가’(1330호), ‘왜 아버지의 성을 따라야 하나요?’(1490호) 등 ‘부성주의 원칙’을 유지하고 있는 민법 제781조 1항 개정 운동에 힘을 싣고 있다.

호주제는 죽었다. 권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가부장문화를 뒷받침하던 법 조문은 사라졌다. 호주제가 사라진 뒤 과연 한국 사회는 성평등한 민주사회로 나아가고 있을까. 호주제 폐지 운동은 가부장제와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호주제 폐지가 곧 가부장제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구상 마지막 노예제로 불리는 가부장제는 아직 공고하다. 가부장제 부수기는 2018년 현재 사회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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