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홍보대사 배우 이영진

가부장 사회서 이야기 주체자는 대개 남성

소외되는 여성 위해 여성영화제 존재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미투(#MeToo·나도 말한다)’ 운동 이후

영화계 내 변화 일어나…

성희롱 발언 하면

‘눈치 주는 분위기’ 형성

 

배우 이영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배우 이영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터질 게 터졌다.”

지난해 김기덕 감독의 폭력과 갑질 혐의에 대한 고발이 나왔을 때 예능프로그램 ‘뜨거운 사이다’ 패널로 출연하던 배우 이영진씨는 이 같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김 감독을 고소한 여성 배우 A씨에 ‘큰 용기를 낸 것’이라며 격려를 전했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집행위원장 김선아, 이하 영화제) 홍보대사인 3대 페미니스타로 활동 중인 이씨는 지난 4일 영화제가 개최한 쟁점 토크 ‘여성가족부XSIWFF 토크콘서트: #WITH YOU’ 행사에 패널로 참석해 당시의 발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했다.

“참담했죠. 영화계는 제 일터고, 가장 보호받는 상황에서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현장인데 그곳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게. (…) 피해자 분들에게 ‘위드유’의 목소리를 보내고 싶었어요. 최근 세상에 나온 다양한 목소리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성폭력 문화와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배우 인생 20년을 맞게 된 이씨는 1998년 모델로 데뷔해 이듬해 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감독 김태용, 민규동)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고,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여자 신인연기상과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요가학원’ ‘4교시 추리영역’ 등 공포 스릴러물에서 활약했으며, ‘로봇, 소리’ ‘환상속의 그대’ ‘고령화 가족’ ‘열여덟, 열아홉’ 등으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연기력을 선보였다. 오는 21일에는 영화 ‘더 펜션’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날 행사를 마친 후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메가박스 신촌 근처 한 카페에서 이씨와 마주 앉았다. 2016년 SNS상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진행되던 때부터 영화계 내 성차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그와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어느 순간 보니 같이 일했던 친구들이 주변에 없더라. 제가 목소리 내기 시작한 것도 더 이상 주위 동료들을 잃지 않기 위한 게 크다”고 말했다.

 

배우 이영진이 지난 5월 2일 서울 서대문구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아트홀에서 열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페미니스타 위촉식을 갖고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배우 이영진이 지난 5월 2일 서울 서대문구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아트홀에서 열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페미니스타 위촉식을 갖고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전히 “여성영화제는 왜 하는 것이냐” “영화에 왜 남자가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오곤 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뭐라고 답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느 극장을 가도, 어느 시간대의 영화를 보더라도 남성영화가 계속 상영 중이거든요. 가부장 사회에서 이야기의 주체자는 대부분 남성이고, 영화에서 주체적 인물로 묘사되는 인물도 남성이에요. 따라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여성들을 위한 영화제로 여성영화제가 존재하는 거죠.”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미투’ 운동 이후 영화계 내에서 변화한 게 있나요?

“우선 남성 배우의 계약서에 성 관련 구설수나 ‘미투’ 관련으로 논란이 될 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됐어요. 예전에는 범죄를 저질러 형이 확정되는 경우에만 손해배상을 하는 것으로 정했었거든요. 그런데 아쉬운 건 ‘미투’라는 어감이 너무 유순하다는 거예요. ‘성폭력, 성범죄 고발’이라고 해야죠. 몰카도 ‘불법촬영’ ‘불법영상물’이라고 지칭하고요. 요즘에 특히 ‘단어가 주는 힘’이 크다는 걸 느껴요. 불쾌하고 부당하다고 여겨지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던 행위도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 덕분에 명확해졌죠. 단어가 존재함으로써 설명할 힘이 생기는 게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성혐오’, ‘미소지니’도 그렇고요.”

-스태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거나 드라마 대본 앞에 성희롱 예방 규칙이 적혀서 나오기도 한다던데요.

“제가 작업한 영화 ‘더 펜션’의 경우 배우를 제외하고 스태프들은 다 교육을 받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원래 방송국에서 정규직 직원들은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는 게 원칙이에요. 하지만 그동안은 한 명이 대표로 가서 시간을 때우고 오는 명목상의 교육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제가 출연한) 드라마 ‘위대한 유혹자’는 촬영 전 외주 제작사와 스태프, 배우와 배우들의 매니저에게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했어요. 또 매회 대본 앞에 ‘촬영 현장 성희롱 예방 가이드’를 포함시켰죠. 이제는 현장에서 (성폭력을) 묵인하거나 동조, 용납하지 않겠다는 암시 같은 거였어요. 뻔한 문구 일색이어도 당연히 존재했어야 했고, 앞으로도 당연하게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위대한 유혹자’를 연출한 강인 감독님은 현장에서 스태프들의 인권이 무시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한 분이어서 정말 좋았죠.”

-이런 생각을 모든 감독님들이 갖고 계시면 좋을 텐데요.

“아직은 ‘이런 것까지 해야 돼?’라는 심리가 반 이상이라고 봐요. 근데 이제는 (성희롱 발언을) 입 밖으로 당당히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는 형성됐어요.”

-눈치 주는 분위기가 마련된 건가요?

“이제는 현장에서 그러면 ‘어? 지금도 그런 발언을 한다고?’라는 반응이죠. 물론 독립·저예산영화 등 아직도 소외된 부분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상업영화 현장에서 누가 그러면 놀랄 걸요. 그 용기에 박수 쳐줄 수 있겠죠. 올해의 여혐상, 오늘의 성차별상 드려야죠.(웃음)”

-그래도 그런 분위기가 확산됐다는 것 자체가 희망적인 것 같아요.

“확실히 ‘클린’한 느낌이 있죠. 그리고 예전에는 꼭 말이 아니더라도 눈빛이나 위 아래로 훑어보는 시선강간이 심했어요. 몰래 ‘흘끔’이 아니라 그냥 대놓고 훑어봤죠. 신체 접촉만 없었지 대화 중에도 눈은 가슴에 고정돼있었어요. 20대 초중반에는 일상이었죠. 정말 불쾌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까지 했었죠. 저 사람들에게는 이런 천박함이 이 일을 하는 동력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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