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제주, 위드유, 가족들
[세상읽기] 제주, 위드유, 가족들
  • 노유다 출판사 ‘움직씨’ 공동대표·작가
  • 승인 2018.05.29 16:03
  • 수정 2018-06-04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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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중심의 ‘괸당 문화’가 

뿌리내린 아픈 역사의 섬에도

비혼 여성들의 공동체, 

또 다른 ‘가족들’이 있었다

 

5월은 사회적 약자에게 으레 고군분투의 달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5월 1일 노동절에 ‘동일노동 동일임금’ 의제를 외치고, 여성 대학생들은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열사의 존재를 찾아 나선다. 성소수자 부부는 5월 21일 부부의 날에 부부(夫婦)가 아닌 부부(婦婦, 夫夫)들의 존재를 드러낼 궁리를 한다.

실상 5월 가정의 달은 가족 내 성폭력 생존자이자 레즈비언인 내게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 프로파간다의 시즌이다. 소외는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맞아 기업에서, 정부에서, 마을 도처에서 준비한 행사들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정상 가족(the family)’ 이데올로기의 수행과 재생산을 공모하고, 그 외 ‘가족들(families)’은 망가진 무엇, 혐오와 차별의 영역에 남겨둔다.

올해 가정의 달은 더 잔인한 5월을 예고했다. 4월 끝자락에 아버지의 장례가 있었고 상주 자리에 성폭력 가해자인 두 오빠가 섰다. 어머니에게 항의해 겨우 발인 당일 새벽에야 아무도 없는 빈소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뜬 아버지 영정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정상 가족을 위장한 비정상 가족의 의례에서 나와 11년 지기 여성 배우자는 여전히 국외자고 이방인이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대명제 앞에 우리는 서로를 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제주 출장이 있었다. 3월부터 ‘미투(#MeToo·나도 말한다)’ 운동을 지지하는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하겠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제주 동네 책방의 행사에 이야기 전달자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잔인한 5월, 가족사의 불행으로부터 탈출하듯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누가 한 생의 무게를 함께 감당해줄 것인가. 전국 동네 책방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를 이야기하고자 기획한 ‘움직이는 세계’ 책방 투어는 연남동 서점 북스피리언스(1회)와 책방서로(2회)에 이어 제주라는 머나먼 섬으로 우려할 만한 모험을 떠났다.

제주 책방 투어의 시발점은 서쪽 중산간 마을 중 한 곳인 저지예술인마을 ‘파파사이트’였다. 북 콘서트 ‘나는 기억이다’에서는 미투 운동과 제주 4·3 70주기를 ‘기억 투쟁’이란 대주제로 엮으며 육지와 섬을 잇는 역사적 정서적 가교를 만들었다. 자신을 코끼리의 친구 고래라고 소개한 제주 4·3 기억 전달자 한상희 제주도교육청 장학사는 생존자 가족의 일원으로서 기억을 복원하고 알리는 제주 여성의 지혜와 단단한 어깨를 빌려줬다. 마을 행사에 따라붙는 정상성의 압박을 얼마간 희석시킨 것은 책과 이야기 사이에 음악 공연이 중간 매개로 기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산리 ‘무명서점’에서는 문단 내 성폭력의 연장선에서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강지혜 시인을 만나 『코끼리 가면』 낭독회를 가졌다. 다양한 지향을 가진 활동가들, 비슷한 무게의 사연을 안고 온 이주민과 여행자들이 책의 구절을 낭독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무명서점의 자리에서 나는 너고 너는 나였으며, 우리는 이따금 이름을 잃는 세상의 이방인들이었다. 공감이란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미투와 위드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했다.

구제주 관덕장 골목의 ‘미래책방’에서는 세상과 자신의 앞일을 미리 걱정하는 건강한 사람들과 만났다. 책방 고양이를 사랑하고 상처 있는 생존자 이야기꾼의 만담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잠시 미래의 변방이 아닌 내부에 머물렀다.

한림 옹포리 ‘달리책방’은 이번 제주 책방 투어의 종착점이자 목적지였다. 달리책방에는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미투 이후 페미니즘과 젠더 관련 책을 함께 읽는 ‘나쁜 페미니스트 북클럽’이 만들어졌다. 여고생 참가자부터 페미니스트 선생님, 제주에서 한 달 살이 하는 20대 청년들, 30∼40대 직장인까지 다양한 여성들의 해방구이자 페미니즘 성지가 된 책방에서 우리는 생의 짐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제주 출신인 달리책방의 박진창아와 현순실 두 책방지기는 4·3 이후 혈연 중심의 ‘괸당 문화’가 뿌리내린 아픈 역사의 섬에서 비혼 여성들의 공동체를 꾸렸다. 섬에 있는 책방에 또 다른 가족들이 있었다. 둘은 제주 동네 책방에 위드유 프로젝트를 최초 발의하기도 했다.

“가족 생각이라면 관둬. 우리는 우주에서 떨어진 사람들이니까.”

50대 책방지기들이 나쁜 페미니스트 북클럽 모임원들과 함께 새벽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사연 있는 손님을 걱정한다. 움직이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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