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넘어 ‘가족들’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가족’ 넘어 ‘가족들’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18.05.22 15:38
  • 수정 2018-05-28 16: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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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결혼을 통해 결합한 이성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만을 ‘정상가족’이라는 틀에 가둬왔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족(the family)은 가족들(families)로 존재해 왔습니다. 한부모 가족, 동성애 가족, 다문화 가족, 1인 가족 등 ‘정상가족’의 틀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우리 이웃에 존재하는 ‘가족들’을 소개합니다.

 

식물을 키운다고 말할 기회가 있으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이렇다. “나는 키우기만 하면 죽던데...” 일명 ‘식물킬러’다. 반면 ‘반려식물’이라는 신조어를 내가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독립한지 5년이 넘어가면서 집에 화초가 하나씩 늘기 시작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고, 비록 단칸방이지만 햇볕이 드는 반지하로 옮긴 후부터다. 지금은 12개 정도 된다. 한번씩은 집주인이 저들이고, 내가 더부살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중에 돈을 주고 산 건 3개, 품종은 4가지다. 다들 나름의 사연이 있다.

먼저 청페페. 동네 다*소에서 산 손바닥만한 청페페는 사실 관상용 치고는 참 수수한 편이다. 다만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잘 자라고 왕성한 번식력까지 자랑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혼자 새 뿌리를 내려 떼어내다 보니 화분이 4개로 늘었다. 손바닥 두 개 크기의 빨간 화분을 사서 식물킬러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줬다. 집까지 배달해 창가에 놔주면서 ‘적당히 물만 주면 절대 죽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가 작년 3월이었는데,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벵갈고무나무는 4년 전 구입 당시 키가 30cm 정도 된 앙상한 묘목이었다. TV에 나온 연예인의 집에 있는 짙은 연두색 잎사귀 풍성한 수형이 너무 예뼜다. 저 아래 누우면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이름을 알 수가 없어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화초를 파는 1톤 트럭과 마주쳤다. 설마 있을까 하고 들여다보니 TV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무성한 화초들 사이에 끼어 있다. 마침 봄철이라 나무가 쑥쑥 자랐다. 문제는 키만 웃자라 회초리 같다는 거다. 그래서 옆가지를 틔우기 위해 자르고 또 잘라냈다.(고무나무는 자르면 끈끈하고 하얀 고무액이 나와서 번거롭다) 자른 가지는 물에 담가놓으면 뿌리가 나온다. 벵갈고무나무도 두 명에게 나눠주고, 집에는 4포기가 있다. TV에서 본 수형의 벵갈고무나무로 거듭나려면 20년은 걸릴 것 같다.

가장 애착이 가는 아이는 ‘사막의 장미’라고 불리는 석화다. 한식구가 된지 6년 정도 된 가장 오래된 아이지만 가장 키가 작고 잎도 적다. 길을 가다 꽃가게에서 발견했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바오밥나무를 닮아 곧바로 지갑을 열었다. 2~3천원 정도 준 손바닥만한 아이지만 코끼리 다리처럼 굵은 밑동에는 수분을 저장하고 있다고 한다. 키우기 쉬운 다육식물이다. 햇볕을 매우 좋아하고 추위를 싫어한다고 해서 해가 뜨면 사무실 창가에, 해가 지면 안으로 들였다. 그러다가 좁은 창틀에서 몇 번을 떨어뜨렸다. 그때마다 가지가 부러지고 뿌리도 다쳤다. 이때문인지 지금까지도 빨간 꽃은커녕 잎 한 장 온전하게 크지 않고 말라서 떨어진다. 재작년 마지막 떨어뜨릴 때는 미안한 마음에 그냥 죽는 게 이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쏟은 흙을 쓸어담으면서, 죽을 때까지 키워보자고 생각을 바꿨다.

더러는 내게 화초와 대화를 하느냐고 묻는다. 난 일부러 말을 걸진 않는 것 같다. 초록색 잎사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말이 저절로 나올 뿐이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우울할 땐 다소간 위안도 된다. 전엔 마주봤지만 요즘엔 아무 생각없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내가 농부의 딸이 아니라도, 엄마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곁을 내줬을 거다. 어쩌면 변덕스런 성격에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나에게 차분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가만히 들여다보라고 나를 길들인 건지도 모른다.

반려동물은 내가 다소간 길들이는 과정이 있다. 먹이를 주고, 훈련도 시킨다. 산책을 원하면 집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취향과 건강, 생활 습관 등에 맞춰주면서 호불호를 파악하게 된다. 동물 역시 사람의 행동을 학습하면서 맞춰간다.

반면 반려식물은 내가 길들여진다. 목이 말라도, 영양분이 부족해도, 그늘 속에서 답답해도 미동조차 없다. 크는 대로, 멈춰있는 대로 그저 지켜봐야 할 뿐이다. 물과 햇빛, 비료를 알맞게 줬다고 생각하지만 마찬가지다. 게다가 식물마다 성향도 천차만별 아닌가. 그 중에서 어느 하나도 내 감정을 1도 헤아려주진 않는다. 아침에 출근할 때 옥상에 꺼내주고, 퇴근해서 가져온다. 그렇게 기약도 없이 잎이 날 때까지, 꽃이 필 때까지 마냥 기다린다. 내 성격이 온순해지게 된 것도 반려식물의 영향도 조금 있지 않나 싶다.

반려식물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애착을 표현하기 위해 쓴 백마디 말보다 확실한 건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이 말인 것 같다.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돼.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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