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과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평화의 시대를 열기로 했다는

역사적 합의를 알린 두 정상

우리는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이현숙 여성평화외교포럼 명예 대표 ⓒ여성신문
이현숙 여성평화외교포럼 명예 대표 ⓒ여성신문
2018년 4월 27일, 오전 9시 30분, 마침내 북측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군사분계선 남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과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두 정상은 손을 꼬옥 잡고 어린아이처럼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경쾌한 웃음을 자아냈다. 나는 오후에 회의가 있어 집을 나섰다. 때마침 아파트 정원엔 때 이르게 만개한 진홍색 모란이 지나가는 이의 눈길을 붙잡았다. 아! 모란이 피기까지, 두 정상이 만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이 봄을 기다려 왔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남북의 두 정상이 유희하듯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던 판문점의 4.27 아침 풍경은 실로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불과 몇 달 전 한반도 전쟁 운운하던 상황을 생각하면 그 시간은 하늘이 개입한 카이로스(Kairos)의 순간이었다. 긴 냉전의 고통과 겨울을 겪어내지 못한 이들이야 이 봄의 이 절절함과 애틋함을 반만이라도 알 수 있을지….

이날 오후, 판문점 도보다리를 걷는 두 정상의 풍경은 한층 더 강렬했다. 냉전의 차가운 바람만 맴돌던 판문점이 저리도 아름다운 숲과 정원을 품고 있었던가? 연초록 물결 속을 가로질러 배치된 하늘빛 도보다리, 그 한쪽 끝에 자리 잡고 앉은 두 사람의 사진, 그것은 영락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봄나들이 풍경이었다. 온전한 평화,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작은 슬픔을 느껴야 했다. 세기적 매듭을 풀어야 하는 두 정상에게 그 숲, 그 정원은 그저 협상의 장, 협상테이블의 연장이었고 그만큼 그들의 대화는 치열하고 숨 막히는 것이었을 테니까.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대체 그들은 무슨 말을 주고받으며 무엇을 만들어내려 했을까?

다 저녁 무렵,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 계단 앞으로 붉은 카펫이 깔리고 그 위로 남북의 두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마침내 기자단 앞에 선 두 정상, 숨죽이며 기다리던 남북시민들 앞에서, 아니 세계 시민들 앞에서 판문점 선언문(Panmunjom Declaration)을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함께 선언하였습니다. (…)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공동목표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두 정상은 평화를 바라는 8000만 겨레의 염원을 담아 종전과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평화의 시대를 열기로 했다는 역사적 합의를 분명한 목소리로 만천하에 알렸다. “이제 우리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이런 날이 오다니….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한국전쟁은 끝날 것(KOREAN WAR TO END)”이라며 “미국과 모든 위대한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의 하루는 우리가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이 날의 평화선포와 감동은 누가 뭐래도 8000만 겨레의 염원을 잘 아는 남·북·미 정상들이 만들어 준 크나큰 선물이었다. 한반도 전쟁 위협→평창올림픽과 올림픽 휴전선언→북측의 올림픽 참가와 북측 특사단 방남→남측 특사단 방북→남측 특사단 방미→미국 폼페이오장관 방북→북의 완전한 비핵화의지 천명→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 등으로 펼쳐진 피스 프로세스(peace process)는 남·북·미 정상들의 지혜와 용기와 결단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한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있다. 그의 진정성 외교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낸 것. 다른 듯, 많이 닮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이에서 문재인의 겸손하고 진솔하고 통찰력 깊은 리더십은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낸 가장 탁월한 힘이었다. 타임지는 작년 5월, 문 대통령을 표지모델로 싣고 그를 ‘협상가(THE NEGOTIATOR)’로 소개한 바 있다. 그가 우리의, 나아가 인류의 소중한 평화자산으로 남게 될 날을 고대한다.

5월, 그가 빚어 낸 또 하나의 정상회담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만들어낼 세기의 북미정상회담. 지난해 우리는 그들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얼마나 마음 졸이며 살아야 했던가! 부디 이번 회담에서 미국의 완전한 비핵화(CVID) 요구와 북의 완전한 체제보장(CVIG) 요구가 맞교환돼 한반도에 평화를 선물하고 나아가 동북아와 전 세계에 핵 없는 세상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안겨주었으면 좋겠다. 거기다 이번 회담도 판문점 통일각 쯤에서 열리면 어떨까? 그러면 아이들 말처럼 ‘완전 성공’일 텐데….

북미정상회담이 성공하고 나면 우리는 곧이어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3자 또는 4자 회담 개최도, 공식적인 “종전 선언”도 보게 될 것이다. 판문점 선언에서 ‘남북은 65년이 되는 올해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로 했으니 아마도 오는 7월 27일 휴전협정일이 종전선언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남·북·미·중 정상들이 판문점에 모여 종전협정 혹은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어린이, 여성, 청년들이 에워싼 가운데 한반도의 종전과 평화를 공식 선언하는 그런 장면을 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꼭 잡은 손을 하늘높이 치켜 들고 평화를 선언하는 역사적 장면을…. 너무 성급한 욕심일까? 65년 동안 정전체제 아래서 넘치도록 고통스럽게 견뎌 왔던 우리에게 성급하다 할 수 있을까?

우리는 5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또 남북 당국자가 상주하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도, 남북적십자회담과 8.15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보게 될 것이다. 각계각층의 남북 교류와 협력도,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도 이어질 것이다. 4월 27일 판문점으로부터 이렇게 하나씩 평화를 경작해 갈 수 있는 길이 우리 앞에 열린 것. 이 모든 평화과정에 여성, 청년, 시민들이 함께 한다면 자칫 허황돼 보일 수 있는 꿈들도, 과도하게 야심차 보이는 정책들도 생생한 현실이 될 것이다. 이번 회담에 참석한 김정숙, 리설주, 두 영부인의 모습과 강경화, 김여정, 두 고위급 여성의 모습이 반가웠다. 앞으로 만들어 갈 모든 평화과정에 여성들의 가치와 경험과 통찰과 지도력이 더해진다면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세상은 보다 지속가능하고, 보다 포용적이고,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정의롭고, 보다 안전하고, 보다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여성들도 이제 판문점의 평화신호에 호응하여 소매를 걷어 붙이고 평화 밭갈이에 나설 준비를 해야겠다. 그 유명한 평양냉면도 먹으면서.

 

이현숙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여성부의장, 2018남북정상회담 자문단, 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전 대통령통일고문회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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