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과 성폭력 없는 체육계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다. 2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56회 체육주간 기념 여성스포츠 인권개선 퍼포먼스 참석자가 피켓을 들고 여성 체육인들의 인권 보장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성차별과 성폭력 없는 체육계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다. 2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56회 체육주간 기념 '여성스포츠 인권개선 퍼포먼스' 참석자가 피켓을 들고 여성 체육인들의 인권 보장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투’ 열풍 속에서도 체육계는 잠잠

성폭력은 ‘수치’, 고발은 ‘집안망신’

체육계 문화 속 여성이 입 열기 어려워

#1. “가해자는 고위직이 돼 돌아오더라.” 

북한의 리듬체조 스타 출신으로, 현재 국가대표 리듬체조 상비군 감독인 이경희 코치는 지난 3월 1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전직 대한체조협회 간부에게 오랫동안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가해자는 “내 말 잘 들어야 코치 생활을 오래 할 수 있다”며 이 코치를 강제 추행하고 수차례 성폭행을 시도했다. 급여 인상을 논의하려 하니 ‘모텔에 가자’고 요구했다. 이런 성폭력이 2011년부터 3년간 이어졌다. 참다못한 이 코치는 2014년 체조협회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대한체육회의 조사가 시작되자, 가해자는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며 2차 가해를 저질렀다. 결국 사표를 제출한 가해자는 2년 뒤 체조협회 고위직에 선임돼 돌아왔다. 대한체육회는 인준을 거부했고, 가해자는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2월 1심 재판부는 ‘가해자가 이 코치를 수차례 성추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 코치와 대한체육회의 손을 들어줬다. 

#2 테니스 선수 출신 김은희 씨는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2001년 7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약 1년간 코치에게 4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당시 교장은 교육청을 통해 이 사건을 파악하고, 김 씨의 부모님에게 알리는 한편 가해자를 사직 처리했다. 그게 다였다. 가해자는 이후로도 여러 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타 대학 물리치료학과에 편입한 김 씨는 2016년 우연히 가해자와 대회장에서 마주쳤다. 김 씨는 이날 큰 충격을 받았고, 가해자를 고소했다. 가해자는 김 씨를 성폭행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게 한 혐의(강간치상)로 기소돼, 지난해 1심에서 징역 10년형과 12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선고받았다.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그의 ‘미투’ 폭로는 지난 2월 방영된 SBS 스페셜 ‘#미투 나는 말한다’를 통해 대중에 알려졌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열풍 속에서도 체육계는 고요하다. 몇몇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이 겪은 폭력을 공론화하긴 했지만, 폭력과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가 체육계 전반으로 퍼져나가지도, 체육계 차원의 대응이 이뤄지지도 않는 모양새다. 성폭력을 ‘수치’로, 피해 고발을 ‘집안망신’으로 여기는 체육계의 풍토가 피해자들의 입을 막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이에리사 (사)이에리사 휴먼스포츠 대표(전 국회의원)이 2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56회 체육주간 기념 여성스포츠 인권개선 퍼포먼스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에리사 (사)이에리사 휴먼스포츠 대표(전 국회의원)이 2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56회 체육주간 기념 '여성스포츠 인권개선 퍼포먼스'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보수적·폐쇄적 분위기가 피해자들 입 막아

여성 활약 늘어도 지도자는 대개 남성

주요 체육단체 여성 고위직은 15%대

국제 기준 30%에 한참 못 미쳐

여성 체육 전문가들은 “한국 체육계의 보수적·폐쇄적 분위기 하에선 애초에 여성 스포츠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100인의 여성체육인회는 지난 2월19일 ‘체육계 미투 선언 김은희, 여성체육인들이 함께할 것’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체육계 성폭력 실태조사를 촉구했다. 이들은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는 인식 속에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진실들이 묻혀온 것이 사실”이라며 “남성 중심주의와 서열 문화가 강한 체육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여성들의 스포츠 참여와 관심은 꾸준히 늘고 있고, 여성 선수의 활약상이 남성에 절대 뒤지지 않는데도, 여성 스포츠 지도자는 지나치게 적다. 사진은 2016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5회 서울 여학생 어울림 스포츠 축제’에 참여한 학생들. ⓒ뉴시스·여성신문
여성들의 스포츠 참여와 관심은 꾸준히 늘고 있고, 여성 선수의 활약상이 남성에 절대 뒤지지 않는데도, 여성 스포츠 지도자는 지나치게 적다. 사진은 2016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5회 서울 여학생 어울림 스포츠 축제’에 참여한 학생들. ⓒ뉴시스·여성신문

코치·협회 간부 등 체육계 지도자 중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성 체육인의 활약상이 남성에 절대 뒤지지 않는데도, 피라미드 구조의 상층부엔 여성이 지나치게 적다. 지난 평창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만 봐도 여성이 약 47%(68명)이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 여성 임원은 51명 중 7명(13.7%)뿐이다. 시·도체육회의 경우 여성 임원은 522명 중 63명(11.4%), 회원종목단체는 1203명 중 175명(14.6%)뿐이다. 이들 단체 내 위원회의 여성위원 비율도 각각 16.8%, 14.5%, 17.1%에 불과했다(대한체육회, ‘여성체육인의 일과 미래’ 보고서, 2017). 대한체육회 산하 19개 분과위원회 중 여성 스포츠 관련 조직은 여성체육위원회 하나뿐이다. 

박영옥 한국스포츠개발원 원장은 “역사적으로 스포츠는 금녀의 영역이었다. 관련 담론을 만들어내는 이들 가운데 여성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여성 스포츠 기자, 스포츠 관련 기관·단체의 여성 지도자는 소수다. 페미니즘 시각에서 이를 전복하려는 시도도 적었다. 스포츠 분야의 남성중심적·집단주의적 전통과 문화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여성은 숨죽인 채 ‘룰’을 지키며 갈 뿐이다. 자기 목소리를 낼 곳이 없다. 선수 생활에 바빠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 사람들 만나서 운동과 삶 이야기를 할 창구도 없고, 그럴 다리가 되어 줄 사람도 적다. 좁고 폐쇄적이고 집단주의 의식이 강한 체육계 내에선 그런 시도를 좋게 보지도 않는다. ‘너 스타 다 됐네?’ ‘네가 뭔데 혼자 언론에 떠드냐?’ 등 비난받고 낙인찍힌다. 그러면 선수든 코치든 더 성장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라고 말했다. 

 

 

2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56회 체육주간 기념 여성스포츠 인권개선 퍼포먼스 현장.
2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56회 체육주간 기념 '여성스포츠 인권개선 퍼포먼스' 현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런 가운데 여성 체육인들이 모였다. ‘여성스포츠인연대’(가칭)를 만들어 함께 체육계의 여성 차별·폭력에 대응하고, 피해자들과 함께하며, 성평등한 체육 문화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사) 100인의 여성체육인회(이덕희 회장), 한국여성체육학회(조미혜 회장), 대한체육회 여성체육위원회(김설향 위원장), 체육시민연대(허현미 공동대표)는 2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분수광장에서 ‘체육계 미투와 함께하는 여성스포츠 인권 개선을 위한 퍼포먼스’를 열었다. 이들은 “남성 중심주의와 서열 문화”를 체육계 내 만연한 성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또 일련의 사건에 대한 “체육 관련 행정기관의 관심, 철저한 조사와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여성체육인들과 함께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원칙과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4개 단체는 오는 6월 1일 ‘여성 체육인 인권 개선’을 주제로 포럼을 열고 체육계의 성불평등 현실을 진단하고 구체적인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조미혜 한국여성체육학회 회장은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나아가 체육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한 제도·정책도 만들 계획이다. 여성 임원 국제 기준인 30% 수준으로 향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 회장은 “범죄에 더 취약한 초등학교 현장에선 여자 선수는 여자 코치가 맡도록 한다거나. 코치들에 대한 재교육·성교육 등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 같이 모여서 변화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원장은 “문화와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제는 한국 스포츠도 민주적이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야 한다. 몇몇 젊은 선수들이 용기를 내어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바꾸려 시도하고 있다. 힘들어도 부딪히면서 이 틀을 깨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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