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나도 말한다)’ 운동 두 달, 여성신문은 5일부터 매주 목요일 3연속 미투 운동 관련 토론회를 여는 국가인권위원회와 함께 미투 운동의 의미를 짚어보고 미래를 위한 노력을 제언합니다. 우리의 일상에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를 고민하고 변화를 제안하는 장이 되길 바랍니다. 의견은 saltnpepa@womennews.co.kr로 부탁드립니다. 

 

 

여성신문-국가인권위원회 공동기획

#WeToo - 미투 너머를 논하다

미투운동 속 무용계가 잠잠한 이유는

‘예술적 사명감’ 내세운 ‘가스라이팅’에

성폭력인줄 모르거나 알아도 말 못해

동성 간 성폭력도 비일비재

“‘미투 지지하는 학생’으로 찍히면, 밖에선 용감하다고 박수받을지 몰라도 무용계에선 끝난 거니까요.” “성추행이고 뭐고 감히 스승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느냐, 어떻게 그런 자세로 춤을 추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학생들의 학내 성폭력 폭로글 중)

‘미투(#MeToo)’ 운동으로 각계에서 자성과 쇄신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무용계는 유독 잠잠하다. 그 침묵을 들여다보면 ‘예술’이라는 대의 하에 반복되는 폭력, 고발이 ‘배신’이라고 믿거나 불이익이 두려워 말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다.

“무용계의 권력층인 가해자들은 웅크리고 이 사태가 진정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눈치를 보고 있고, 수많은 피해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사회화할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실이다.” 이지현 춤비평가·전 세종문화회관 이사의 말이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가 19일 서울 중구 서울YWCA회관에서 연 세 번째 ‘미투 운동 연속 토론회’에 참석해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무용계 내 성폭력의 원인과 실태를 진단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4월 19일 서울 중구 서울YWCA회관에서 마지막 미투 운동 연속 토론회 ‘문화예술계 성폭력, 원인은 무엇인가?’를 열었다. (왼쪽부터) 윤단우 작가, 이연주 작가, 김태희 연극평론가,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원장, 유지나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좌장인 조영선 인권위 사무총장, 이지현 춤비평가, 정세랑 작가, 이성미 시인, 조형석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장이 참석했다. ⓒ이세아 기자
국가인권위원회는 4월 19일 서울 중구 서울YWCA회관에서 마지막 미투 운동 연속 토론회 ‘문화예술계 성폭력, 원인은 무엇인가?’를 열었다. (왼쪽부터) 윤단우 작가, 이연주 작가, 김태희 연극평론가,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원장, 유지나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좌장인 조영선 인권위 사무총장, 이지현 춤비평가, 정세랑 작가, 이성미 시인, 조형석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장이 참석했다. ⓒ이세아 기자

무용계는 ‘청정지대’가 아니다. 최근 미투 운동 이후로도 여러 사건이 드러났다. ‘한국의 춤꾼’으로 알려졌던 인간문화재 하용부((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는 2001년 성폭행을 저지른 사실이 피해자의 폭로로 드러나 지난 2월 사과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무용학원의 10대 원생들을 성추행해 징역 4년형을 받은 원장 김모 씨도 있다. 가천대·창원대·한예종 등 대학 무용과 교수나 강사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폭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용계 내 권력형 성폭력을 성찰하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2년 전 ‘#OO계_내_성폭력’ 고발 운동 때도 무용계는 잠잠했다. 왜일까. 

무용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작용하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가해자가 상황을 조작해 피해자의 현실 인식과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일)’ 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무용계의 많은 관계는 자발적인 충성 또는 애정에 의해 유지된다. 좋은 무용수를 길러내어 더 좋은 작품을 생산하고 그로 인해 무용 세계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이 ‘가스라이팅’의 주요 동력이 된다.” 무용칼럼니스트 윤단우 작가의 설명이다. 

무용계 내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단순한 도제 관계 이상이다. 스승은 춤을 가르쳐 준 은인이자 삶의 결정권을 쥔 인물이다. 실제로 상급학교 진학, 콩쿠르 입상, 무용단 입단, 군 면제(정부 지정 12개 국제 대회에서 2위 이상 입상자, 2개 국내대회에서 1위 입상자는 군 면제의 혜택을 받는다) 여부가 스승에게 달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불이익을 무릅쓰고 피해를 고발했다가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주변의 지지조차 잃을 수 있다. 스승에게 개인 지도를 받다가 성폭력을 당한 이들은 ‘너는 혜택을 받지 않았느냐’는 주변의 눈초리와 자기 검열 앞에서 고발을 망설인다.  

무용 지도 과정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가해자의 ‘특이한’ 취향이나 지도 방식쯤으로 치부하는 무용수들도 많다. ‘몸은 예술의 도구’, ‘몸의 원리를 알려주는 스승이야말로 내 몸의 주인’이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성폭력을 겪어도 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워한다. 남성 스승이 남성 제자를 상대로 저지르는 성폭력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피해자들은 ‘아웃팅’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

“미투 운동, 무용계 내 만연한 착취 문화 드러내”

 

2015년 4월14일, 전북대 무용학과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이모 무용학과 교수가 2002년부터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을 침해했다”며 교수 퇴출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무용학과 학생 제공
2015년 4월14일, 전북대 무용학과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이모 무용학과 교수가 2002년부터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을 침해했다”며 교수 퇴출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무용학과 학생 제공

이지현 평론가는 “미투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성착취만이 아니라 노동·경력 착취 등 무용계 내 착취 문화”라고 말했다. “무용계에는 ‘공연노예’라는 말이 있다. 무용과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머리 빗어 넘기라고 하면 빗어 넘기고, 올리라면 올리고, 뭐든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와도 같다며 학생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다. 예술인의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그 학생이 권력을 쥔 안무가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윤 작가도 동의했다. “무용계 내 성폭력은 사실 대학 교수 임용 비리, 입시 비리, 학력 위조, 공연 강요와 티켓 강매, 선후배 간 군기 문화, 지원금 횡령 등 무용계 착취 구조와 갑질 문화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 여러 무용인들은 이제 예술보다 인권이 먼저인 사회를, 권력자가 돼 남을 부리기보다 누구도 부당하게 착취당하지 않는 창작환경을 만들 때라는 데 뜻을 모았다. 한국무용협회는 3월 19일 “(미투 운동은) 단순히 성폭력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불평등과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라는 논평을 내고 “무용계 내외부에서 각종 피해를 봤을 무용인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물론 “미투유투(내 인권, 네 인권 모두 소중하다) 교육과 운동을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윤 작가는 “미투 운동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은 몇몇 유명인들을 처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들의 반성을 끌어내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인들의 연대는 변화의 첫걸음이나, 연대의 동력은 현실적 힘을 발휘하는 법제도다. 조형석 인권위 차별조사과장은 “폐쇄적이고 소수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현행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충분한 감시와 제재가 어려운 문화예술계의 특성을 반영한 별도의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단순히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 성희롱 방지 의무를 법에 명시하는 일을 넘어서, 피해자를 지원하고 문제 해결과 재발 방지 과정을 성평등 관점으로 감시하는 별도의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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