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점이 ‘미, 투!’를 통해

점으로, 선으로 연결되고

변화의 면적이 되려면 필요한

징검다리가 많아져야 하는데

부족하고 위태롭다

 

 

 

“미투는 지지하지만 그 사건은 글쎄”, “저 주장은 미투가 아니지”. 미투는 사회문화적 혁명이라고도 표현된다. 그런데 고발된 어떤 사건들은 판단보류 또는 혹독한 진위감별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보편적 지지는 크고 넓어지는 듯하지만, 개별 사건과 피해자에 대한 의심은 뾰족하고 좁아져 가는 상태는 아닌가. 그 간극에는 무엇이 있거나 없을까. 하나의 점이 ‘미, 투!’를 통해 또 하나의 점으로 이어지고, 선으로 연결되고 변화의 면적이 되려면 필요한 징검다리가 많아져야 하는데, 부족하고 위태롭다.

 

‘미투 사건’을 대하는 실무적인 두 반응이 있다. 하나는 팔짱 끼기와 판단보류. 확실하냐, 증거 있냐, 평판이 안 좋은데 네 말을 어떻게 믿냐, 과거에 이런 이력이 있으면서 무슨 분란을 일으키냐, 상대방이 억울하다는데 어떡하냐. 오래전부터의 반응이지만, 미투의 영향력이 클수록 감별의 판은 더 커졌다. 떡볶이집에서, 커피숍에서 사람들은 “피해가 있었대” 보다 “그거 아니라던데?”라는 말에 좀 더 마음 편하게 기댄다. 문제 제기자가 진 입증책임의 무게는 다른 연대 책임자를 부르기에 너무 크다고 알려졌다. 당연히 사건의 진행을 관망하고 소비하는 쪽을 선택한다.

두 번째는 절차 없는 꼬리 자르기다. 어느 회사에서 미투 이후 성희롱, 성추행 사내 경험 조사를 했는데, 사례를 쓴 응답자가 나타나자 누가 작성한 것인지 색출했다고 한다. ‘가해자를 밝혀라, 그 사람을 자를 테니’라는 종용에 작성자는 곤혹스러워졌다. 회사는 회사 이름이 거론되며 문제 될 가능성을 사전차단 하겠다는 목표를 실행하려 했다. 대학이나 공공기관, 일부 정당도 비슷한 선택을 한다. 문제는 지목된 성추행 자를 자르고 나서, 고발자는 보호됐는 가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두 반응의 공통점은 성폭력 고발, 약자의 증언이 이 세계에 던져지는 ‘질문’이라는 점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던 사람의 폭로는 판결문도 아니고 권고문도 아직 아니다. 결정권의 부재, 힘의 부재 상태에서 절박한 터뜨린 발화는 질문 상태다. 폭로자는 묻고 있다. 왜 성폭력은 가능했고, 지속됐으며, 앞으로도 제지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는가. 미투가 권력 관계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라 할 때 거기에 등장하는 것은 몇몇 일탈한 괴물이 아니라, 그 행동을 ‘정상적’ 권한 사용 범주로 용인해왔던 구성원들이기도 하다. 피해자는 자신을 포함해 곳곳의 수신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질문이 있을 때 ‘합리적인’ 반응은 무엇일까. 성폭력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 그에 대한 반응이 합리적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미투에 기대하는 변화의 한 지표다. 그런데 성폭력을 둘러싼 현재의 질문은 대부분 피해자를 향해있고, 그 방향은 피의자의 무죄이며, 과정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도’이다. 한 마디로 국가와 피의자, 피고인 간의 힘 관계를 고려해 강압과 고문, 재판 없는 처벌을 제한했던 형사 소송상 지위 규정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채택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판사가 되거나, 신중한 배심원, 피고인의 변호사가 되는 선택지에 들어간다. 그런데 왜 사법 불신주의가 높은 나라에서 유독 성폭력 문제는 법정에만 맡기는가. 또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검사나 성폭력 피해자 변호사 역할은 상상하지 않는가.

미국 수정 헌법 9조는 교육기관에서의 성차별을 배격하고, 성폭력에 대한 예방책임을 명시한다. 그에 따라 대학들은 ‘대학은 법정이 아니다’를 정책과 지침에서 명확히 한다. 형사 소송상의 질문과 대학이 책임지고 검토할 질문은 다르다는 것이다. 사회와 조직 구성원이 다양하고, 각자의 역할에 대해 일정한 역량이 요구되는 것처럼, 성폭력 역시 질문이 수신된 자리에서 합리적이고 역량 있는 질문이 이어져야 한다. 연애전문가는 ‘사귄 거다’라는 주장에 사귄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인사담당자는 ‘실수였다’는 주장에 대해 책임의 수용기준은 무엇인지, 이웃 시민들은 ‘기억나지 않는다’에 대해 윤리적 통감의 태도와 범주는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다. 더 좋은 질문이라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며, 이는 많은 구성원의 참여와 역할을 요청한다. 더 좋은 징검다리가 놓였을 때 남성 중심적인 판단에 머물러 온 법정도 다른 걸음을 디디어 갈 것이다. 미투 이후에 이제야 나온 ‘판결에 성인식이 필요하다’는 대법원 판례처럼.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