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폐경의 달 맞아 ‘폐경’ 다시보기

“봄에 꽃구경 가듯 가을에 단풍구경들 가잖아요. 젊음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중년도 나름대로 깊은 멋이 있죠. 그리고 이제야말로 자식과 남편에게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서글프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죠.” 2년 전 폐경을 경험한 나이 쉰둘의 이씨(관악구 신림동). 폐경 후 한동안은 ‘이제 여자로서 끝이구나’ 하는 생각과 ‘이제까지 뭐하고 살았나’ 하는 허무함에 우울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 사소한 일로 가족들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엔 가족들에게 폐경 사실을 숨겼다가 하소연이라도 하고픈 심정에 딸에게 털어놓았다.

“딸아이의 첫마디가 ‘축하한다’는 거였어요. 그게 뭐 축하할 일이냐 했더니, 그동안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고생했으니 이제라도 엄마 인생을 제대로 한번 살아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 울고 말았어요. 그리고 며칠 후 서예학원에 등록했고 등산도 시작했죠.”

그후 안면홍조와 우울증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이씨는 요즘 꾸준히 운동한 덕에 몸도 날씬해져 딸과 옷을 함께 입을 수 있게 됐다고 흐뭇해한다. 여성으로서의 삶의 끝인 줄 알았던 폐경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월경기보다 길어진 폐경기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폐경을 질병으로 인식하는 견해가 우세했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것도 남성과의 비교를 통해서 여성의 월경과 폐경이 부정적 병리현상이 아닌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관점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폐경기 여성은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고정관념과 달리 대부분의 폐경기 여성들이 우울증 없이 지낸다는 연구 결과들도 이런 인식 변화를 뒷받침했다. 어떤 학자는 폐경기가 쇠락기가 아닌 활력이 증가하는 인생의 ‘인디안 썸머(Indian Summer: 미국에서 일년 중 여름이 지나갈 무렵에 가장 더운 며칠을 의미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폐경에 대한 인식 변화와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것은 평균수명 연장과 관계가 깊다. 최근 한 여성호르몬 수입판매업체가 전국의 만 50∼59세 여성 12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나라 여성들은 평균 16.5세에 월경을 시작해 만 50세에 폐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약 80세로 늘어난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월경기로 보내는 시간만큼 폐경 이후의 삶이 길어진 것이다.

또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의 질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면서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에서 해방된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크게 늘었다. 스포츠센터 뿐 아니라 각 지역 복지관의 건강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여성들도 많이 늘었고, 주택가 주변의 공원 등에서는 아침저녁으로 건강달리기를 하는 중년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빈둥지 증후군’ 취미생활로 극복

구로동에 사는 윤씨(51)는 일주일 내내 스케줄이 빡빡하다.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은 인근 종합병원에서 자원봉사,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은 성당 활동을 하고, 수요일엔 복지관에서 인터넷을 배운다. 그리고 매일 오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인근 산에 약수 뜨러 간다. 대개 아침 8시면 집을 나서 오후 7시에나 집에 돌아온다.

“애들 대학까지 보내고 나서는 시간이 많이 남아 실컷 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워봤어요.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가족들은 다 자기 일로 바쁜데 나는 나이만 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분도 우울하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죠. 폐경 직후에는 증상이 심해 정신과 치료도 받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어요. 그러다 성당 형님의 권유로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바쁘게 지내면서 몸이 많이 좋아졌죠.”성공한 남편과 잘 자란 자녀를 두고도 왠지 허전하고 무기력해지는 ‘빈둥지 증후군’도 폐경기 여성에게 자주 찾아온다.

김상준 정신과 전문의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 폐경을 전후해 자기 시간이 많아지면서 소외감과 위축감으로 인한 괴로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취미생활이나 봉사활동을 통해 자기 시간을 갖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전한다.

30년 후엔 43%가 폐경 여성

노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 나라 여성의 20% 정도가 폐경 여성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30년 후엔 43%가 폐경 여성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더이상 폐경이 여성 개인의 문제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아직까지 폐경 여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전무하다. 수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50∼79세 폐경 여성 16만여 명을 대상으로 15년간 생활습관과 질병과의 인과관계를 조사하는 여성건강증진 프로젝트를 시행 중인 미국의 경우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은미 여성한의원 원장은 “여성의 건강은 다음 세대를 위한 측면 뿐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며 “단기적 모성보호 방안 뿐 아니라 출생에서 임신, 출산을 거쳐 폐경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전 생애에 걸친 건강권 확보를 위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최이 부자 기자 bjchoi@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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