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22년 동안 일하고 임원이 된 필자가 직장생활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는 여성 직장인들에게 선배로서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주>

 

 

[나도 승진하고 싶어요] ②

 

제가 회사 생활을 처음 시작할 1995년은, 요즘의 우리나라 회사 환경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우선 대졸 여성 사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여직원 채용 및 활용”에 대한 S그룹 회장의 강력한 의지와 조금씩 마련되는 젠더평등 분위기 덕분에 여성 직원을 채용하긴 했으나, 이들과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던 때였습니다. 여성 직원은 주로 서무, 행정, 비서 업무를 했고 당연히 급여와 승진에서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요즘은 많은 남성들이 가사노동도 하고 즐겁게 요리도 하지만 당시에는 부엌도 가지 않는 시절이었지요.

어느 날, 타부서의 직원이 업무회의 차 왔습니다.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은, 타부서의 직원(고참 차장, 남성), 우리 부서의 직원(고참 과장, 남성), 그리고 저(신참 과장, 여성)였습니다. 타부서 직원은 제가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고요. 하반기에 진행할 ‘협력업체 만족도 조사’라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위해 처음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통상 타 부서에서 회의를 하러 오면, 서무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커피를 준비해줬는데, 그 날은 아마 그 직원이 부재 중이었나 봅니다. 저는 “아, 커피가 없네요”하고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타서 들고 갔습니다. “이거 박사가 타주는 커피니 엄청 비싼 겁니다” 하면서요. 잠시 웃고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일하던 조직이 더 큰 사무실로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이사를 해야 한다고 5월 5일 어린이날에 모두들 출근을 했습니다. 5월 4일에 이삿짐을 싸두고 퇴근하면, 밤새도록 이삿짐센터가 옮겨주고, 저희는 5일 출근해서 이삿짐을 풀고 정리해, 6일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업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지요.

5일 출근해서 저에게 배정된 책상을 찾고 제가 싸두었던 짐을 찾아서 PC, 서류, 문방구 등을 다 정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서 공동의 짐들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자잘하고 무겁지 않은 짐들은 주로 여성 직원들이 정리하고, 남성 직원들은 주로 크고 무거운 짐들을 정리했지요. 빨리 마치면 빨리 집에 갈 수 있는 것이니 다들 빨리 빨리 했습니다.

그런데 부서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원형 테이블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남성 직원 두 명이 테이블을 옮겼는데, 거기에 딸린 원형 유리가 있었습니다. 꽤 무겁긴 했지만 마침 그 곳에 있던 제가 들어보니 들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유리를 끙끙대며 들고 갔더니 자리를 정리하던 부장님이 “아니, 연약한 여성 직원에게 이런 힘든 일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라는 농담 반 잔소리를 했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여성 직원이 해야 하는 일, 하지 말아야 하는 일 등을 정해서 하기보다는 상황에 맞게 최적의 사람이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옛날에는 커피는 여자가 타오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여자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다 잘못된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거운 것은 남자가 하고 여자는 가볍고 편한 것만 해야 한다.” 이 역시 선입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앞의 경우에서 보면, 더 어린 직원이 회의에 참석했으면 그 직원이 커피를 준비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더 고참인 직원이 커피를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책상 유리를 들 힘이 안 됐으면 더 힘센 직원을 불러야 하겠지요. “이 업무는 여자가 해야 해, 반대로 이런 업무를 여자에게 하라고 하면 잘 못 된 거야” 라는 성역할 편견 때문에 굳이 다른 사람을 부르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업무를 지연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상황에서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냥 하면 되는 거지요.

커피를 타면 남성 직원들이 여성 직원을 우습게 안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여자니까 박사니까 커피 타는 일은 내가 안 해”라고 버티면, 저를 조직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반면 제가 거부감 없이 커피도 타가면 함께 일하기 편안한 동료라고 생각할 겁니다. 마치, 제가 무거운 것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거나 못을 박아야 할 때, 부탁하지 않아도 나서서 처리해주는 남성 직원들을 매너 있는 멋진 동료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저는 그렇게 행동한 덕분에, 상사건 후배건 남성들이 주도하는 조직에서 편견 없이 잘 버텼습니다. 아무도 커피 타는 저를 우습게 보지 않았습니다. 성역할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남성의 일, 여성의 일에 대한 편견 없이 상황에 맞게 일을 하는 것입니다.

조은정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소비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은정 박사는 1995년 삼성그룹 소비자문화원에 입사해 22년간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 연구소장, 프린팅사업부 마케팅그룹장 등 삼성전자의 마케팅 및 역량향상 업무를 진행했다. 여성신문에서 재능기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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