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성폭력 정부 정책 나왔으나

변화 위해 권력의 집중 줄이고

창작과 그 구현은 노동이자

생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아직도 가끔 인용되는 이 시는 80년대 우리 문단의 무게를 더했던 최승자 시인의 작품이다. 사랑이 뭐나 되는 줄 알았지만 여성을 기다림 속에 가두는 모진 것. 그래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여성의 타자성에 대한 환부를 드러내 보여주었던 시인. 일상에 안주하면 그저 희미하게만 인지될 뿐인 여성의 고통을 시의 영역에 불러들여 표현했던 작가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미투(#Metoo)의 정국에 선봉에 선 그룹이 문학이 아니었던가. 그 비범하였던 여성 시인은 모두 어디 있나. 사랑을 구원의 공간이라 믿으면서도 더불어 여성을 단지 육체로 대하는 모순이 행해지는 동안, 그 민낯에 저항한 여성들은 병들거나 죽고 쫓겨났다. 최승자, 박서원, 최영미 등이 그들이다.

 

등단과 심사, 추천권을 쥐고 있는 남성 중심적 문단은 손쉽게 그들을 퇴출할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문단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영화계, 연극계에서 들려오는 성폭력 사건을 보며 여성의 목소리를 압살한 사회, 여성을 성적 대상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던 숨은 결탁의 세력들에게 찬사했던 우리에 대해 자책하며 쓰디쓴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더욱 억울한 것은 이들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을 증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별과 억압은 명분을 만들어가며 은밀하게 자행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이 상황이 뭐지’하며 갈등하는 동안 그들은 피해에 동의한 사람이거나 지나치게 까칠하거나 무능하거나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이 되어 주변으로 밀리고 빈곤의 늪으로 떨어진다. 막연하지만 확실히 진행되는 이러한 야만을 지켜보면서 움츠러드는 것은 인지상정. 미투 정국은 이 기이하고도 불편부당한 현실을 복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현실에 대응해 여러 차례 대책을 내놓았다. 문화예술인 성폭력 신고센터도 100일간 운영하며, 법률구조공단에서는 피해자 법률 지원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런 구체적인 정책은 좋다.

그러나 특히 피해의 범위와 정도가 큰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건의 특별대책은 독특한 국면이 있다. “‘괴물들’의 성폭력과 독선적 행위가 ‘천재들의 기행’으로 여겨지고 ‘집중된 권력’에 너그러웠던 풍토는 갑질과 권력형 성폭력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남인순 국회의원의 지적은 문화예술계의 전근대적 성 의식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창작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등단제도를 폐지하고 문학상·기금 등 심사위원 겸임을 줄이는 등 권력의 집중을 줄여야 한다. 문화예술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긴 하지만 그 스스로 자본이 될 수 없다는 특성이 있다. 창작과 그 구현은 현실을 초월한 그 무엇이 아니라 노동이자 생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인 창작준비금 지원을 늘리고, 지급 방식도 개선하겠다는 정책은 문제의 본질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아울러 프랑스처럼 공연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분야도 일정 시간 이상을 활동하면 고용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반갑다. 이 모든 전망이 예산과 제도를 갖춘 정책으로 자리 잡기 바란다. 진심으로 우리 사회가 예술인에 대해 자행했던 갑질이 청산되는 시금석이 되기를 바란다. 다시는 권력을 몰아 쥔 한 사람이 인간을 모욕하고도 우리 눈 앞에서 예술적 행위를 흉내 내는 불온함을 경험하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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