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밥. 꽃. 양>

사전검열 시비로 무기한 연기된 울산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던 <밥·꽃·양>(임인애 감독, 라넷 제작)은 1998∼2000년까지 현대자동차 노조식당 여성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싸움과 노조와 회사를 상대로 한 복직투쟁, 그리고 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노조운동 내의 성적소수자로서 당하는 고통, 노조운동의 내면화된 위계질서와 권위의식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7월 중순 천막농성을 시작한 아줌마들이 2000년 1월 노조와 회사를 상대로 한 복직투쟁을 접고 노조식당의 계약직 하청 노동자로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이 숨가쁘게 전개된다.

더운여름 밥까지 해먹여가며 싸웠는데

“밥주걱 부대 깃발에 아줌마들 루즈 자국을 찍다”라는 문구를 적고 다른 조합원들과 함께 천막농성에 들어갈 때만 해도 아줌마들은 자신들이 집중적으로 희생의 제물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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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쓰던 남비며 쟁반을 국자로 두드리며 시위에 나선 아줌마들에게 남성 조합원들은 “아줌마들이 나서니 투쟁이 신이 난다”며 이들을 ‘투쟁의 꽃’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8월에 접어들면서 아줌마들은 사수대가 먹을 밥을 짓기 시작했다. 회사측에 의해 가스마저 끊어진 상태지만 아줌마들은 작은 가스통 2개로 300명이 먹을 하루 세끼를 만들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어도 경비를 줄이기 위해 시장에서 우거지를 주어다 깨끗이 다듬고 삶아 국을 끓여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아줌마들은 비로소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임을 실감하며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회사측의 식당 여성조합원 하청화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던 아줌마들은 이기호 노동부 장관과 중재단이 내려온 뒤인 19일 뉴스에서 식당 아줌마 160명 정리해고 방침 보도를 듣게 됐다.

불안과 초조에 떨던 아줌마들은 21일 아침 7시 30분 노조위원장과 간담회를 가졌다. 위원장은 아줌마들에게 “중재안을 수용하고 이 싸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느냐 아니면 중재를 거부하고 공권력 진압으로 끝이 나느냐”라며 “식당아줌마들이 정리해고를 받아들인다면 노조가 식당운영권을 가지고 전원 고용승계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1시간 반 뒤인 9시까지 입장을 정리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자신들의 사활이 달린 문제를 짧은 시간에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위원장을 믿고 아줌마들은 정리해고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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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새벽 6시 30분 노사 양측은 중재단의 중재안에 합의, 협상은 타결되었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1261명은 무급휴직, 277명은 정리해고되었다. 천막에 끝까지 남아있던 식당아줌마 144명은 전원 정리해고됐다.

다른 천막들은 다 철수했지만, 그날 밤 아줌마들은 천막에 다시 모였다. 노조위원장이 사장인 노조식당에 하청직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 실감도 나지 않고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들이 여전히 조합원이라는 사실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는데, 더운 여름에 밥까지 해먹여 가며 싸웠는데 왜 자신들만 전원 정리해고됐는지 아줌마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복직되겠지” 희망사항으로 끝나

그래도 자신들이 희생당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아줌마들은 경기가 호전될 경우 정리해고자와 희망퇴직자들을 다시 부른다는 노사합의에 기대를 걸고 11월 1일부터 밥짓는 노동을 시작했다.

정리해고 조치 이후 현대자동차는 1999년에는 4800억 순이익과 2000년 8000억 순이익 목표를 잡을만큼 형편이 나아졌다. 아줌마들은 1999년 8월부터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자기 편이 돼줄 줄 알았던 노조측은 아줌마들의 복직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투쟁 과정에서 아줌마들과 경비들 사이에 마찰이 빚어져 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당하자 아줌마들은 노조측에 신분보장을 요청했다.

그러나 노조운영위원회는 “4대 의결기구 결정사항으로 인한 신분상의 불이익이 아니므로 신분보장 불가” 결정을 내린다. 이때가 12월 21일. 아줌마들은 노조 앞에 천막을 치고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단식 14일 만인 2000년 1월 18일 ‘노조식당해고자복직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아줌마들의 투쟁에 대한 신분보장을 결정했다. 그러나 복직은 되지 않았다. 지금도 아줌마들은 계약직 노동자로 일한다.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임인애 감독은 “노조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이 모양새가 안좋다며 아줌마들을 지지하지 않는 가운데 아줌마들이 이를 악물고 투쟁을 접으며 허탈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정리해고라는 테마를 통해 노동자의 생존과 존엄이 박탈당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한다.

라넷팀은 5시간이 넘는 전체 필름 중 주요한 사건을 뽑아 편집한 2시간8분짜리 작품을 인권영화제에 출품할 계획이었다. 현재 이 작품은 안티인권영화제 홈페이지에서 꼭지별로 상영하고 있다.

최이 부자 기자 bjchoi@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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