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풍요만을 쫓다가는…

헤스티어 콤플렉스라는 병명을 들어보았는지.

로버트 알트먼의 2000년 작 <닥터 T/ Dr. T & the Women>(18세, 트럼프)에 의하면 이 낯선 콤플렉스는 그리스 여신 헤스티어로부터 명명되었다. 헤스티어는 집, 가정 생활, 처녀의 정숙을 보호하는 여신이었는데, 사랑을 경멸하고 거부하다 어린아이처럼 되어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헤스티어 컴플렉스는 상류층 여성에게 주로 발견된다. 물질적 안정, 나무랄 데 없는 자녀,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편 등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삶 때문에 두려울 게 없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만 자아 발견의 동기가 없어져 어린아이처럼 퇴행하는 것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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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T>에서 이 컴플렉스로 입원한 이는 주인공 T(리차드 기어)의 아름답고 가정적인 아내 케이트(파라 파세트). 고급 쇼핑몰 분수에 들어가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알몸이 되어 입원하게 된 그녀는 자신을 방문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며, 어린 아이가 그린 것같은 그림을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휴스턴의 유명 산부인과 의사 트레비스가 주변 여인들로 인해 겪게 되는 수난을 그린 코미디물 <닥터 T>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케이트처럼 입원만 안했다 뿐이지, 강박증에 있어서는 오십보 백보다.

어린 세 딸에게 공주처럼 흰 드레스와 머리 장식만을 해주는 처제 페기(로라 던)는 늘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고급 쇼핑몰 나들이와 온 집안을 어지럽히는 케이크 만들기가 유일한 소일거리다. 장녀 디디(케이트 허드슨)는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 들러리인 연인 메릴린(리브 타일러) 사이에서 갈등하다 메릴린을 꿰차고 도망을 가는 레즈비언이며, 차녀 코니(타라 라이드)는 ‘나만은 정상’이라고 아버지를 위로하나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매달려 있다. 골프 코치 브리(헬렌 헌터)는 골프를 즐길 수 없어 프로 생활을 그만두었다며, 옷을 훌훌 벗어던지며 닥터 T를 유혹해 놓고는 골프 투어를 떠난다. 이 모든 소동을 지켜본 여비서 캐롤린(셜리 롱)은 “선생님에겐 좋은 아내가 필요하다”며 팬티를 벗는다. 모피와 보석으로 몸을 휘감은 상류층 아줌마들은 친절하고 섹시한 닥터 T의 진료를 받기 위해 기절 소동을 일으키고.

냉소적 시선으로 미국적 가치를 꼬집어온 알트먼 감독은 미국의 물질적 풍요 추구가 여성들에게 이처럼 허망한 강박관념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풍요니 여유니 하는 단어와 거리가 먼 여성은 적어도 헤스티어 컴플렉스와는 인연이 없을테니 안심해도 좋겠다.

옥선희/ 비디오 칼럼니스트 oksunhee@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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