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 #MeToo 운동 ‘긴급’ 토론회에서 발제문 형태로 공개된 글로, 저자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동의하에 여성신문을 통해 소개합니다.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의견은 saltnpepa@womennews.co.kr 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지금 용기 있는 목소리로 고발을 이어가는 피해자들에게 지지와 연대의 의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피해자들을 응원하는 여성은 저뿐만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으며, 지지의 목소리가 온·오프라인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세상의 절반인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를 고발하는 우리들은 절대 혼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여성문화예술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희주라고 합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2016년 10월에 시작된 ‘#○○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으로 생긴 9개 조직의 연대체로서,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정책과 제도로서 해결하기 위해 지난 1년 동안 여러 활동을 해왔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고발 이후 주요 언론에서는 한국의 미투(#MeToo) 운동이 난생처음이며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도했지만, 바로 1년 전에 문화계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미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로 여성 신진 작가들에게 상습적인 성추행을 저질렀던 모 시립미술관의 큐레이터가 해고됐으며,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로 고양예술고등학교 실기교사로 근무했던 당시 상습적인 성폭력을 저질렀던 배용제 시인이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로 연대한 영화인들의 목소리가 ‘남배우 A 성폭력 사건'의 1심 무죄 판결을 뒤집고 2심 유죄 판결을 끌어냈습니다. 언제나 늘 유구하게 존재해왔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일이 다시는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 20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계 전 분야에 걸친 실태조사 실시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내 신고 센터 설립, 성폭력 의혹이 있는 예술인의 보직 임용을 막고 지원 배제를 강화하는 방안 등을 발표했습니다. 문체부가 여성문화예술연합과 지난 1년간 정책 논의 과정에서 미온적이었고 타 부처로 떠넘기려는 모습도 있었지만, 이번 발표로 문화예술계 성폭력 대책을 책임질 소관 부처라는 것을 공표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문체부가 발표한 정책은 작년 2017년 2월 저희 여성문화예술연합이 문체부에 이미 전달했던 정책 제안서의 일부입니다. 1년 동안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저희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가, 연극계의 심각한 연쇄적이고 집단적인 성범죄가 알려지고 나서야 나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체부는 “지난 2월에 여성단체와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논의하고 성폭력 실태 임시조사를 했다”고 하지만, 지난 1년간 저희의 항의에 대해 ‘소귀에 경 읽기’인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임시 실태조사의 경우도 정권이 바뀌고 나서 연락을 전혀 받지 않다가, 저희가 지속해서 항의하고 나서야 어렵게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희는 2017년 10월에 실시되었던 ‘예술 분야 성폭력 실태 시범조사'의 조사 문항에 대한 자문, 문항 수정 등의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아직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문체부가 지난 1년간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에 의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지금 미투의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체부의 발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대책이 장기적인 접근의 대책일 뿐이지 지금 당장 시급한 연극계 성폭력이나 캠퍼스의 성폭력 문제에 대응할 방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폐쇄적인 극단 혹은 캠퍼스에서 일어났던 집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연이어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 사회가 과연 이 목소리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온라인에서는 집단적인 2차 가해가 빈번하고, 언론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받아쓰기만 하며 가해 행위를 불필요하게 묘사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낸 피해자들을 파악하여 당장 필요한 긴급 지원을 하고, 사건을 목록화하고 사건별 공소시효를 따져 수사 기관에 사건을 접수하고, 보복성 고소에 대비하고, 성범죄를 묵인하고 방조했던 주변인들을 조사하여 구조적인 문제를 밝히는 등의 단기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에 저희 여성문화예술연합은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성명서를 통해 요구하신 진상조사위원회를 포괄하는 문체부 대책위원회를 만들 것을 제안합니다. 이번에 알려진 성폭력 사건은 가해자들이 커다란 문화 권력을 수십 년간 행사해온 유명인이고, 집단적인 묵인과 방조, 협력이 연쇄적인 성범죄가 가능하게 했으므로 수사기관과 별개로 철저한 진상 조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정책과 제도의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현재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이 위원장으로 위촉된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를 모델로 삼아, 온라인이나 기사로 고발된 사건을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전반의 성폭력 사건을 심층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조사를 통해 파악한 개별 사건을 포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여 단기적, 장기적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16년에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실명으로 고발한 대다수의 피해자가 명예훼손과 모욕 등의 보복성 고소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직 고소가 끝나지 않은 사건도 있습니다. 당시의 고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모두 그러한 보복성 고소 때문입니다. 현재 고발 중인 피해자들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보복성 고소로 인해 받는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함께 고민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여성문화예술연합도 지난 경험을 발판삼아 연대하겠습니다. 이러한 연대가 사실적시 명예훼손 형사처벌 폐지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재인 정부는 한국의 강간문화를 부수는 이 거대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피해자들에 대한 더욱 진심 어린 사과와 적극적인 협력을 표명해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했던 이윤택은 지난 대선에서 문 대통령의 찬조 연설을 했습니다. 이윤택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아닙니다. 여성가족부와 여성단체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탁현민 행정관이 청와대에서 근무하도록 용인되는 것, 성폭력 전력에도 불구하고 손한민 씨가 대통령 직속 국가일자리위원회 청년분과위원장에 임명됐던 것,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정치적 공작이라고 떠드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여전히 사회 권력층인 방송인 김어준 씨. 이런 것들이 더해지고 더해져, 이윤택 같은 남성이 여성들을 손쉽게 착취하고도 여전히 사회의 존경을 받는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이 거대한 강간문화를 타파하고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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