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권 보호’ 국가 의무로

규정한 헌법 제 36조 2항

어머니·딸·아내가 아닌

시민으로서의 여성의

권리에 관심 기울여야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이 2017년 1월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가임거부 시위를 열고 행정자치부의 대한민국 출산지도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이 2017년 1월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가임거부 시위를 열고 행정자치부의 대한민국 출산지도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인권운동의 진전으로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이란 개념이 1994년 카이로 인구개발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Population and Development, ICPD)에서 제시됐다.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World Conference on Women) 행동강령에 명시된 이래, 성관계의 여부, 시기와 파트너, 임신‧출산 여부와 시기 등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이에 대한 양질의 사회서비스 및 정보에의 접근권, 건강권 등의 포괄적 권리가 국제사회에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 SRHR) 개념으로 정립됐으며, 세계 각국은 이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해왔다.

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권리가 기본권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임신‧출산은 인구관리 차원이 아니고서야 공적 이슈로 다뤄지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새삼 성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개념화하고 규약을 제정해 그 실현을 강구하는 것은, 여성의 삶을 묵살해왔던 과거의 세계와 단절하려는 노력이었다.

성폭력에 대한 한국 형법 제32장의 제목은 1995년까지 ‘정조에 관한 죄’였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성이 어떻게 위치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법제도의 개선을 위한 각계의 노력으로 제도적으로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대다수 여성들이 일상에서 성적 침해 또는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가부장적 이성애자 성인 남성 외 다른 존재들의 성적 존엄성과 주체성은 인정되지 않았던 과거 세계의 자장 안에 살고 있다.

지난해 말 ‘여성의 성‧보건 인권을 위한 한국정부의 조치’로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알려달라는 유엔(UN)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의 요구에 정부는 임신‧출산에 대한 지원책만을 나열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공적 지원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여성의 성‧보건 인권은 임신하고 출산할 권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모든 여성이 안전한 월경용품을 사용하고 생식건강을 위한 지식과 의료서비스를 제공받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피임방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안전하고 자유로운 성적 관계에서 피임을 실천하며 상대에게도 요구할 수 있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임신을 중단할 수 있고, 누구나 아이 낳기를 원한다면 그에 필요한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

임신‧출산에 대한 국가 지원도 당사자들이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건강과 행복을 누리도록 지지하기 위한 것인지, 인구를 생산하고 기를 자원으로서 여성이 양질의 신체와 능력을 갖도록 관리하고자 하는 것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60~80년대 산아제한 정책으로 무리하게 피임‧불임 또는 임신중절 수술을 종용하다시피 했던 국가가, 10여년간 공공연하고 대대적으로 자행된 ‘여아 낙태’에는 무관심했던 국가가, ‘저출산’을 위기로 표방하고 ‘인공임신중절 예방’, ‘출산 장려’, ‘모성 보호’를 위한 갖가지 정책을 펼친다. 여성 개인의 안녕과 권리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처럼 다뤄진다. 정권을 막론하고, 안 낳는 쪽을 지원하든 낳는 쪽을 지원하든 여성을 출산의 도구이자 통제,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국가의 관점은 일관되었다. 지난해 수많은 여성을 분노케 했던 보건복지부의 ‘가임기여성 지도’는 이러한 관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임산부가 ‘내일의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으면 자리에 앉지도 못하는 현실은 단지 지하철 칸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출산하지 않는 여성은 말할 것도 없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공익’인 태아의 생명권이 ‘사익’인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우선한다며 형법상의 낙태죄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 낙태죄의 온존으로, 임신중단을 결정한 여성들은 최선의 의료를 제공받고 건강상의 문제에 신속하고 안전한 의료적 조치와 휴식을 취할 기본권을 박탈당한다.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임신중단을 고발하겠다는 남성 측의 협박에 범법자 신분으로서 휘둘린다. 피임 실천율은 고작 10% 밖에 되지 않고, 양육 책임은 여성에게 과도하게 지워져 있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감히 임신을 중단한 죄’로 의료적‧법적 사각지대에 내몰린다. 국가는 이 여성들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36조 2항은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쓰고 있다. 국가는 왜,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일까? 헌법이 제정됐던 40년대, 마지막으로 개정됐던 80년대에 위정자들이 ‘어머니’나 ‘딸’이나 ‘아내’가 아닌 시민으로서 여성 개개인의 권리와 삶의 질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시민들은 강간 문화와 성폭력을 더 이상 묵인하지 말라고, 여성은 출산의 도구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즉, 한국사회에서 시민은 누구로 상정되는가, 이 사회가 보장해야 할 시민권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낡은 헌법은 이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담지 못한다.

인권의 개념을 확장하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것은 지속돼온 문제의 심각성을 공동으로 인지하고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이다. 국가권력에 대비되는 추상적 개인, 사실상 남성만을 그 주체로 상정했던 인권의 가치를 다양한 시민이 어울려 살아가는 관계와 구조 속에 실현시키기 위해 더 섬세하고 적극적인 기준선 정비가 필요하다. 새로운 헌법이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국가의 폭력, 통제, 묵인의 역사로부터의 단절적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은 성적 주체로서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재생산에 관해 스스로 결정하고 충분한 사회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 개정되는 헌법은 이 지극히 당연한 약속을 담아내야 한다. 새로운 출발선을 딛고, 우리는 성과 재생산 권리를 위해 더 강하게, 서로 등을 맞대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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