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보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장

20여년 경력의 모금·배분 전문가

폭력피해여성·결혼이주여성 등 약자 인권 보호 노력

“한국 기부규모 급성장...미국 다음으로 커

나눔문화 성숙 위해 단체·개인 책임감 더 높여야

주는대로 받으라는 시혜적 태도 위험

받는 이의 다양한 욕구·권리 존중해야

기부·나눔 분야 여성 인재들 간 네트워킹 절실”

 

지난 19일 여성신문이 만난 장보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19일 여성신문이 만난 장보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난하다고 해서 비싼 ‘롱패딩’을 꿈꿔선 안 될까? 최근 한 기부자의 사연이 온라인을 달궜다. 이 남성은 자신이 매달 복지재단을 통해 3~5만원씩 후원하던 11세 아동이 “20만원대 롱패딩을 선물로 받고 싶다”고 했다는 이유로 후원을 그만뒀다며, “날 후원자가 아닌 물주로 생각한 게 아닐까” “알고 보니 애가 피아노를 배우던데 실은 가난하지 않은 것 같다”라는 글을 온라인에 올렸다.

한국 사회에서 기부란 으레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시혜’로 여겨진다. 기부·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이런 관점에 반대한다. “기부는 고귀한 행위다. 그러나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푼다는 식의 태도는 위험하다. 도움을 받는 이들도 다양한 욕구와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라고 장보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장은 말했다. 

그는 약 20년간 사회복지 정책연구·실행 경험을 쌓은 모금·배분 전문가다. 대구가톨릭대 가족복지학 박사 수료 후,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시작으로 울산·대구·경남지회를 거쳐 2014년부터 나눔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다. 지역 여성폭력 피해지원 기관을 돕고 여성폭력 피해자·결혼이주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도 벌였다. 올해 여성신문이 주최하는 ‘2018 제16회 미래의 여성지도자상’을 받았다. 

지난 19일 서울 정동길의 공동모금회 사무실에서 장 소장을 만났다. 이곳 나눔연구소에선 그를 필두로 연구원 15명이 나눔문화 교육, 여성·다문화 관련 나눔 의제 발굴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상근 연구원 5명 중 4명이 여성이다. 장 소장은 “직원들이 마음 편히 육아휴직할 수 있는 환경, (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는) 여성들에게 자신 있게 권장할 만한 조직 문화를 갖췄다고 장담한다”며 “앞으로 다양한 강점을 지닌 여성들을 많이 기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모금회는 국제사회와도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2010년 UWW(세계공동모금회)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아시아태평양교육센터를 운영하면서 일본·중국·호주 등 아태 10개국의 모금기관과 협력해왔다. 우수 사례 수출에도 성공했다. 태국과 필리핀은 공동모금회의 ‘착한가게’(중소상인이 참여하는 기부 프로그램) 모델을 자국에 도입했다. 고액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 모델도 올해 중국과 인도에 도입 예정이다. 

사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의 기부문화는 빈약한 편이다. 영국자선지원재단(CAF)이 지난해 발표한 ‘세계기부지수(World Giving Index)’를 보면, 한국의 기부참여지수는 34%로 139개국 중 62위에 그쳤다. 관련 기관·단체에 대한 불신도 깊다. 아동구호기구 유니세프 한국위원회(한국 유니세프)에선 고위 간부의 성희롱 의혹이 일어 31일 현재 고용노동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 공동모금회만 해도 임원진이 모은 기금을 횡령하거나 방만하게 운영하고, 정치편향적으로 배분하고, 지원금을 받은 사업자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반복되며 수차례 구설에 올랐다. 

 

- 올겨울 강추위와 더불어 ‘기부 한파’가 왔다던데요. 

“많은 국민들의 공동모금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죠. 기부 자체를 불신하게 돼 버렸다고도 하십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신뢰할 만한, 새로운 기부문화를 만들 기회라고 봅니다.

사실 우리의 기부문화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UWI(세계공동모금회·United Way International : 한국·미국·영국 등 46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나눔 네트워크) 참여국 중 한국의 기부 규모가 미국에 이어 2위입니다. 미국식 기부·나눔 문화를 동양권에 적용하기 쉽진 않은데도, 우리만의 독특한 기부문화를 만들어내며 급성장했습니다.” 

- 한국의 ‘나눔 문화’는 얼마나 성숙했다고 보시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나눔 문화’라는 말도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기부와 나눔은 다른 개념인데요. 나눔 문화가 성숙하려면 경제 발전만이 아니라 대중의 인식, 기부자와의 접점, 기관의 운영 성숙도 등이 함께 높아져야 합니다. 일단 대중들이 모은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잘 알지 못해요. ‘어디서 얼마를 모금했다’에 관한 기사는 많이 나와도 ‘어디에 썼다’는 기사는 드물죠. 기관이 더 노력해야죠. 기금을 어떻게 사용해서 어떤 변화를 낳았는지 명확하고 세심하게 보고해야 합니다. 나눔에 동참한 분들도 더 꼼꼼해져야 해요. 검증되지 않은 기관이나 개인이 SNS에 거짓 사연을 올려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거든요. 

공동모금회는 국가별 기부금 규모를 비교하는 지수를 만들 계획입니다. 몇 년 전부터 만들고 있는 ‘나눔지수’를 더 정교하고. 국제 기준에 맞춰 확장하려 합니다. 유아·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기부·나눔문화 교육도 꾸준히 하고, 1020 세대를 겨냥한 모바일 기부 프로그램도 개발 중입니다.”

- 최근 ‘후원 아동이 값비싼 의류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후원을 중단했다는 한 기부자의 사연이 논란이 됐죠. 기부를 시혜로 여기는 대중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은데요. 

“기부는 고귀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푼다’는 식의 태도는 위험하죠. 도움받는 이들도 다양한 욕구와 권리를 지닌 인격체입니다. 아이들이 남들이 많이 입는 옷을 입어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죠. 이젠 인권의 관점에서 기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는 사람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건 옛날 얘깁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주시는 대로 먹고 입겠습니다’라는 태도를 기대할 순 없습니다. 필수 생존요소 이상의 것들이 제공될 때 아이의 성장 가능성도 커지지요. 가진 게 더 많은 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혜택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요. 단지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문화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불평등합니까.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기부 문화가 있는 게 아닌가요.”

- 죽어가는 아이들, 고통받는 이들의 이미지로 점철된 모금·후원 광고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기부 포르노’라는 말도 나왔는데요.

“개인적으로 그런 광고에 반대합니다. 공동모금회도 얼마 전까지 불쌍한 아이의 이미지를 내세워 광고를 했는데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이미지를 내세운 선정적 광고가 ‘센세이션’을 낳으면서 모금 시장이 급격히 성장한 건 사실이에요. 지금도 국민 정서를 파고드는 데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고요. 담당자들이 갈등할 수밖에 없죠. 그러나 성숙한 나눔문화를 만들어가길 원한다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광고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볼 때입니다. ‘불쌍한 아이’를 강조하기보다 그 아이가 건강해진 미래와 희망을 말하는 식이지요. 더 밝고 미래지향적인 광고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몇몇 구호단체는 ‘젊은 여성들이 기부를 안 한다’는  사실인가요?

“통계를 보면 성별을 떠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기부 참여율이 가장 낮긴 합니다. 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찾는 힘든 시기니까요. 하지만 30대 이후로 생활이 점차 안정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기부 참여율이 점점 늘어납니다. 굳이 성별로 나눠 보자면 남성들 중엔 중년의 고액 기부자가 많고, 여성들은 적은 돈이라도 정기적으로 기부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30~40대 엄마들의 기부 참여율이 높습니다. 큰돈을 기부하는 건 부담스러워도 매달 2~3만원씩 기부하는 건 마음 먹기에 달렸거든요.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더 나은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 연구소장을 맡으신 지 5년이 됐는데, 아쉬운 점은 없나요?

“그동안 연구에 성인지 개념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앞으로 성인지 기부 통계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사회복지 지원 대상이라고 다 같은 이들이 아니고, 노인도 여성 노인, 한부모 가족도 여성 한부모 가족의 문제를 따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니까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여성 관련 사회복지기관이 너무 적어서 어렵긴 합니다만 더 많은 여성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의제도 꾸준히 발굴하려 합니다.”

- 원래 기부나 나눔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젊을 때부터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제가 80년대 학번인데, 대학 때 친구들과 도시 빈민 문제에 관한 책도 돌려 읽었고요. 1998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법’이 제정돼 광역별 공동모금회 지회가 설립됐을 때 대학 지도교수 추천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잠깐만 일하고 학문에 전념할 계획이었는데, 할수록 매력적인 일이예요. 그새 20년이 흘렀네요.”

- ‘미지상’ 수상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의미 있는 상으로 한 해를 시작하게 돼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내년에 50세인데, 다음 10년을 준비하는 데 좋은 자극제가 될듯합니다. 이번 상은 제가 받게 됐지만, 기부·나눔문화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 인재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나하나는 다 반짝이는 별들인데, 각자 제자리에서 분투하고만 있어요. 이 별들이 은하수를 못 이루다니요. 여성들의 네트워킹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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