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여성캐릭터와 여성중심의 서사가 담긴 ‘여성영화’에 대한 목마름이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남성이 무리지어 나오고 남성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속칭 ‘알탕영화’에 지친 탓이겠지요. 이에 <여성신문>은 배우, 감독, 영화 제작자, 평론가, 영화인협회 등 영화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한국 영화판의 현황을 들여다보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성감독에 기회 주는

타깃제 등 지원 늘리고

‘여성은 흥행작 못 만든다’는

굳은 고정관념 없애야 

 

지난 12일 오후 서울 중구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성평등 구현을 위한 영화정책 포럼’이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12일 오후 서울 중구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성평등 구현을 위한 영화정책 포럼’이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영화에서 여성이 사라진 지 오래다.” 최근 젊은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야기다. 이는 “남성들이 떼로 나오는 영화 언제까지 봐야 하나” “브로맨스 영화 지겹다”는 비판과 맞닿아있으며, 나아가 “여성영화를 보고 싶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영화판에서 여성 인력은 살아남기 힘들고, 여성 이야기가 제작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성평등이 시대정신이라지만, 성차별적인 사회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변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영화계에도 해당되는 문제다. 사회전반적인 인식 변화가 성평등을 이끌어내는 최선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의 인식이 바뀌기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영화계 내 성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당장 어떻게 해야 할까?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중구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린 ‘성평등 구현을 위한 영화정책 포럼’에서 ‘성평등 영화 정책의 도입이 시급하다’를 주제로 발표하며 “인위적으로 정책 개입을 하지 않는다면 10년, 20년, 50년, 100년이 지나도 영화판은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인구의 반은 여성임에도 여성의 이야기가 대표되지 않거나 여성 인력이 문화산업 현장에 들어가는 것 또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100년 넘게 영화산업이 진행되는 동안 5~10%라는 여성감독 비율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수치다. 특히 자본과 자원이 가장 집중돼있는 할리우드는 여성감독이 4~5%에 불과하다”며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수치가 오랜 기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성 불평등 문제가 구조의 문제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그냥 두고 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 스웨덴, 영국 등 유럽 국가는 영화 내 성평등을 이룩하기 위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중 스웨덴은 가장 앞서 전면적인 성평등 영화정책을 도입했다. 2011년 안나 세르너는 스웨덴의 영화진흥위원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영화계 내 성불평등 문제 해결을 선언했다. 그는 2015년까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하는 공적 기금의 혜택을 받는 감독 성비를 50 대 50으로 올리겠다고 밝힌 뒤 이를 2014년에 달성했다.

영국감독조합은 지난 10년간 영국 영화산업에서의 주요 창작 직군 성비와 경력발전을 분석해 지난해 보고서를 발표하며 영화진흥위원회(BFI·British Film Institute)에 영화계 내 성평등 정책을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의 여성 감독 비율은 10%대 초반인 반면, 의상 담당은 80%, 캐스팅 담당은 60%대 후반을 기록했다. 이 조사는 영화산업 직군에 성역할 고정관념이 투영돼있음을 보여줬다. 아울러 영화제작에 있어 결정권을 갖고 있는 주요 창작 직군에서도 남성의 비율이 높았다. 감독 직군에서 여성의 부재는 여성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으며, 더 나아가 현장의 영화인력 구성 성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영국감독조합은 영화산업의 공정한 기회와 다양성 촉진, 시장의 확대를 위해 공적기금 지원 대상 성비를 50:50으로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성평등을 성취하기 위한 정책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BFI는 이를 받아들여 2020년까지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중구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린 ‘성평등 구현을 위한 영화정책 포럼’에서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발표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12일 오후 서울 중구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린 ‘성평등 구현을 위한 영화정책 포럼’에서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발표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핵심은 할당제(quota)제가 아닌 타깃제(target)다. 타깃제는 할당제와 달리 남녀동수를 목표로 한다. 조 프로그래머는 “할당제는 가령 1000만원 중 100만원만을 ‘여성 기금’이라고 이름 붙여 지원하는 것”이라며 “결국 100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남성이 차지하고, 여성 감독들은 작은 풀 안에서 경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되면 여성 감독들은 계속해서 저예산 영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상업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는 ‘여자는 큰 영화 못 만든다’ ‘여자 감독은 흥행을 못 시킨다’는 편견까지 낳게 된다. 

조 프로그래머는 “할당제는 굉장히 시혜적인 지원 방식이다. 호주, 영국 등에서도 할당제를 운영해봤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내지 못했다”며 “실제로 긍정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모든 영화 공적 기금에 성인지적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사결정권을 지닌 핵심 인력에 여성을 배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여성 제작자, 감독, 작가 등의 부재는 실제적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홍재희 감독은 “현재 의사 결정권자라고 할 수 있는 투자자, 즉 돈줄과 권력을 가진 이는 대개 남성”이라며 “직장 내에서 고위 임원이 모두 남성으로 구성돼있듯 영화계 내에서도 상업영화를 제작하고 투자·배급할 수 있는 요직은 거의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여성이 결정권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하더라도 그가 젠더 의식이나 인권 감수성을 갖고 있느냐를 장담할 수 없을 뿐더러, 한 명의 여성 결정권자로는 전반적인 남성중심적 구조를 바꿀 수 없다”고 진단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젠더 이슈가 화두에 오르며 그간 발화되지 못했던 비판의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이 흐름을 타고 영화 내 성평등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조 프로그래머는 “이러한 물결을 통해 영화산업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나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영화 내 성평등을 이루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도입해야 할 때”라고 단언했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한인철 영화진흥위원회 공정환경조성센터 팀장은 “여성영화인모임과 올해 초부터 영화계 내에 있는 각종 성폭력 실태조사를 비롯해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발족까지 함께 해왔다”며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이뤄진 것은 없다. 그 과정에 여러분들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주신다면 저희가 반드시 그 내용을 받아들여 해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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