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변혜정 신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

30여년간 여성인권운동 현장 헌신

“여성운동이 살아야 여성정책 산다”

 

변혜정 원장은 “성매매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같다”면서도 “성매매 여성 인권에 대한 이해가 결국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이를 알리고, 피해 여성들의 새로운 일터·생존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변혜정 원장은 “성매매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같다”면서도 “성매매 여성 인권에 대한 이해가 결국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이를 알리고, 피해 여성들의 새로운 일터·생존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근 한 가정폭력 가해자가 자녀를 만나겠다며 피해자 보호시설에 침입했다. 출동한 여성청소년계 경찰관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아이를 만나게 해주면 그냥 갈 것”이라며 방관했다. ‘가정폭력 사건인 줄 알고 늦게 출동해’ 살인사건을 막지 못한 경찰들도 있었다. 지난 달 14일 대법원은 이 경찰들의 직무상 과실과 유족에 대한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가정폭력은 범죄다. 이 당연한 명제는 ‘집안 일’, ‘아이는 부모의 소유’라는 통념 앞에서 종종 힘을 잃는다. 현행법은? 가정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은 ‘가정의 평화와 안정 회복, 건강한 가정 유지, 피해자와 가족구성원 인권 보호’를 가정폭력 대응책의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역시 ‘가정 보호’가 최우선 목표다. 

“개인이 가정 안에서만 행복하다는 믿음은 건강하지 못해요. 정말 가정을 보호하려면, 국가가 ‘가정폭력은 범죄’라고 선언하고 제대로 처벌해야 합니다.”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가정폭력 범죄의 경우, 형사사법기관의 빠른 개입과 가해자에 대한 무관용 원칙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사법 관계자들의 의식 수준은 여전히 낮다며 안타까워했다. “현직 판검사들은 아직도 ‘가정보호가 핵심’, ‘가정 해체는 안 된다’고만 합니다. 변화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네요.”

여성인권진흥원은 여성폭력 예방과 근절, 폭력 피해자 지원 등을 위해 설립된 여성가족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지난달 말 4대 원장으로 임명된 변 원장은 30여년간 여성인권운동 현장에 헌신해온 전문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장, 서강대학교 성평등상담실 상담교수, 여성인권진흥원 비상임 이사, 전 충북도청 여성정책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지난 6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 여러 여성 인권 이슈에 대한 견해와 정책 청사진을 밝혔다.

 

앞으로 상상 못한 여성 대상 폭력 등장할 것

뿌리 깊은 가부장제·정상가족 신화 성찰하고 바꿔야

-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 20주년이다. 그런데 가정폭력 사건에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여전히 나온다.

“결국 ‘가정폭력 사건 해결 목표는 가정 보호’. ‘아이는 부모의 소유’라는 낡은 인식이 문제다. 기존 법체계가 과연 누구를 보호하는지 그 전제부터 검토해야 한다. 가족과 개인의 관계, 성역할 등에 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결국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깨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 피해자 지원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가정폭력 가해자를 교정하지 않은 채, 상담만 하고 집에 돌려보냈다가는 폭력을 재생산할 우려가 있다. 가해자를 집에서 쫓아낸다 해도 문제가 모두 해결되진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가 집에 감금될 수 있다. 피해자가 더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외부에서 가정폭력 사건에 개입할 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안전 보장은 물론 피해자가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법의 촘촘한 해석과 개정을 통해 지원 사각지대도 줄여야 한다.” 

- 정부와 여당은 ‘젠더폭력방지기본법’ 제정 논의에 착수했고, ‘젠더폭력 범부처 종합대책’도 준비 중이다. 

“가정폭력·성폭력 등 젠더폭력 법제화는 모두 여성운동의 성과다. 여성 대상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새 정부의 염원도 담겨 있다고 본다. 모든 정부 부처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종합대책이 나온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 젠더폭력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도 일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젠더폭력이라는 용어가 우리 어법에도, 논리에도 맞지 않다고 본다. 성 이분법 비판을 위해 나온 ‘젠더’가 다시 성 이분법을 고착화하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단어가 나온 맥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남성들은 ‘젠더폭력’ 사용을 반기며 ‘남성도 폭력의 피해자다’ ‘역차별적인 여가부 정책에 대한 전환’이라는데, 그런 의미에서 만든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기존 용어(‘여성폭력’)와 법체계는 분명 현실의 폭력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 앞으론 상상할 수 없었던 유형의 폭력이 등장할 것이다. 범죄는 날아가는데, 정책은 기어간다. 새로운 종합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는 게 지금 한국 사회다.”

- 진흥원이 할 일은. 

“기존 폭력방지 체계를 정비하고, 산발적인 피해자 지원 추진체계도 점검해 체계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여성단체 등과 함께 젠더폭력 담론도 만들어가야 한다. 젠더폭력이라는 용어가 왜 필요해졌고 이 현상을 어떻게 정의할지, 당장 수많은 폭력 피해자들을 어떻게 지원·구제할지, 기존 법체계는 새로운 젠더폭력 관련 법제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여성단체 등과) 함께 논의하고, 진흥원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 젠더폭력 관련 제대로 된 통계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 쉽지 않을 듯하다. 

“해바라기센터, 여성긴급전화(1366) 센터 통계는 갖고 있는데, NGO나 상담소 통계까진 입수하기 어렵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 물론 현실의 폭력은 기존 법제도에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폭력은 중첩된다. 예를 들면 각각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있었다. 이 피해자는 가출한 후 생계를 위해 채팅앱 성매매에 나서게 됐다. 이 피해자는 어디로 가야 할까? 성폭력 피해자 쉼터?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 성매매 피해자 쉼터? 기존 법 지침상 즉시 손쓰기 어려운 사례지만, 여러 예산과 지침을 요모조모 잘 살펴보니 지원이 가능했다. 의지만 있다면 맞춤형 지원이 가능하다. 행정도 인간이 하는 일이니까. 제가 여성계를 떠나 5년간 ‘어공’(어쩌다 공무원) 생활을 하며 터득한 사실이다.”

 

전주시의 대표적 성매매집결지 서노송동 선미촌 업소. 올해 초 제정된 ‘전주시 성매매피해자 등의 자활지원 조례’엔 서노송동 선미촌을 폐쇄·정비하는 한편, 성매매피해자들의 탈성매매와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사항들이 명시됐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전주시의 대표적 성매매집결지 서노송동 선미촌 업소. 올해 초 제정된 ‘전주시 성매매피해자 등의 자활지원 조례’엔 서노송동 선미촌을 폐쇄·정비하는 한편, 성매매피해자들의 탈성매매와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사항들이 명시됐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성매매, 여성 인권 문제라는 사실 알려야

피해 여성들 일터·생존터 마련 정책 필요

성매매 피해자뿐 아니라 지원 종사자 인권도 중요

여성인권진흥원은 성매매 근절과 관련 인식 개선, 성매매피해자 지원을 위해 설립된 기관이기도 하다. 최근 전국적인 성매매 집결지 폐쇄와 성매매여성의 자활 지원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면서 진흥원의 어깨도 무거워졌다. 변 원장은 “성매매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같다”면서도 “성매매 여성 인권에 대한 이해가 결국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이를 알리고, 피해 여성들의 새로운 일터·생존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뿐 아니라 성매매 피해 지원 종사자의 인권도 중요하다”며 종사자들의 인식과 처우를 점검·개선하겠다고도 했다.

- 정부와 지자체, 시민단체가 함께 전국 성매매 집결지 폐쇄에 나섰다. 서울 성북구, 아산시, 대구시, 전주시 등 여러 지자체는 성매매피해여성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도 발표했다.  

“지자체의 성매매피해여성 자활지원조례는 ‘성매매도 범죄’라는 인식 전파에 매우 긍정적이라고 본다. 해당 지역들은 모두 반성매매 운동, 여성운동이 활발한 곳이더라. 여성운동의 성과가 정책 성과로 만들어지는 ‘젠더 거버넌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여성운동이 살아야 여성정책도 산다. 

그런데 살펴보니 성매매 여성 자활 지원보다는 집결지 주변 풍속 개선 요구, 성매매에 대한 부정적 낙인 여론이 더 부각되기도 하더라. ‘성매매 자발론’은 여전히 강력하다. 여성들도 ‘국가는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여자들도 피해자라며 지원하느냐’고 묻더라. 어려운 문제지. 그러나 청량리 때처럼, 성매매 집결지를 강제철거하고 재개발하는 식의 정책은 지양해야 한다. 집결지 그 자체를 역사화해 사람들이 성매매여성의 인권 문제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드는 작업, 여성의 새로운 일터·생존터를 마련하는 방향의 정책이 필요하다.” 

- 여성계에선 ‘피해자 자립 지원뿐 아니라 불법 성산업 감시와 축소 노력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온다. 이를 위해선 관련 종사자들의 역량 강화와 처우 개선도 중요하다.

“최근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 종사자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여러 보도로 알려졌다. 매우 유감이다. 젠더 감수성, 반폭력 감수성이 없다면 직원 자격도 없다. 여기는 직장이자 운동판이다. 종사자들의 젠더감수성 개선 교육에 힘쓰려 한다. 피해자 응대 매뉴얼을 외우는 수준이 아니라, 체화하도록 해야 또 다른 실수를 막을 수 있다. 대국민 인식 개선에도 노력하겠다.

여러 종사자들의 열악한 처우와 ‘번아웃’도 심각한 문제다. ‘권리는 없으면서 의무만 많은 게 반성매매 운동판’이라고들 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다 책임져야 하고…. 기회만 있으면 ‘탈성매매’, 즉 이직하고 싶어한다. 이들이 이렇게 떠나도록 방치하면 안 된다. 이들의 전문성이야말로 폭력 예방을 위한 궁극적 자원이다. 여가부가 종사자들의 처우 개선 의지를 밝혔으니 기대해본다.”

 

- 진흥원 내 고용 불안도 문제 아닌가. 전문 기관인데도 전 직원이 비정규직이라니 심각한 문제다. (관련기사▶ 공공기관이 비정규직 양성소?)

“맞다. ‘정규직 0명’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바꿀 방법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이 오명을 씻고, 진흥원의 위상을 다시 확립하는 게 제 첫 번째 과제다.”

- 내년 진흥원의 주요 현안은 무엇인가.

“정부 정책도 대변하면서도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 전달하는 다리가 되려 한다. 진흥원은 주로 여가부 사업을 위탁 수행하고 있지만, 여성계와 현장의 소리도 잘 듣고 전달해야 한다. 진흥원의 위상부터 높이려 노력하겠다. 취임 이후 여성단체, NGO 활동가들에게 ‘진흥원이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요즘 단체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하고 있다. 진흥원과 단체들은 상생 관계다. 파이를 뺏는 게 아니다. 과거엔 그런 소통과 지원이 잘 안 됐다. 자성하면서 바꿔 나가려 한다. 활동가들 보수교육, 정책 담론 형성, 틈새 지원 등 현장 단체들이 개별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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