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극장] 팜므파탈? 카르멘은 이별살인 피해자다
[기울어진 극장] 팜므파탈? 카르멘은 이별살인 피해자다
  • 윤단우 무용 칼럼니스트
  • 승인 2017.12.12 17:07
  • 수정 2017-12-17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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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 ‘카르멘’ ⓒPixabay/Creative Commons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 ‘카르멘’ ⓒPixabay/Creative Commons

“호세, 당신은 나한테 불가능한 걸 요구하고 있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그리고 그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해.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얼마간의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어. 당신은 나의 롬이니 나를 죽일 권리가 있어. 하지만 카르멘은 언제나 자유로울 거야. 보헤미안으로 태어나서 보헤미안으로 죽을 거야.”

이제는 메리메의 원작소설보다 비제의 오페라 주인공으로 더 유명해진 카르멘이 죽음을 앞두고 연인 돈 호세를 향해 던진 마지막 대사다. 메리메의 소설이 출간된 지 30년이 지난 1875년, 비제는 파리의 오페라코미크 극장에서 오페라 ‘카르멘’을 올렸다. 관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랑하는 남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련한 여주인공에게 익숙해 있던 19세기 오페라 관객들에게, 자신이 내키는 대로 남성에게 다가가 유혹하고 그에게 싫증이 나면 다른 대상을 찾고 도둑질이나 살인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카르멘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여성상이었다. 이 작품은 훗날 100년이 훨씬 지나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게 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자주 공연되며 널리 사랑받는 오페라 레퍼토리로 자리잡았지만, 비제는 작품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서른일곱에 세상을 떠났다. 

카르멘은 호세를 다시 사랑할 수 없고 같이 살기 싫다고 말한다. 호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는 카르멘을 ‘악마’라고 표현하며 그의 몸에 칼을 꽂는다. 호세는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고, 카르멘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그를 죽이는 것밖에 없었다고 강변한다. 

‘열정과 질투와 살인의 이야기’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카르멘에 포커스를 두어 바라본다면 ‘자신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으로 유혹한 남자를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의 이야기’로, 렌즈를 돈 호세 쪽으로 옮겨본다면 ‘순정을 다 바친 여성에게 배신당하고 살인자로 전락하는 순진한 남자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함정이 있다. 두 관점 모두 결국 ‘나쁜 여성의 유혹에 넘어간 죄 없는 청년이 살인자가 되어 인생을 망치는 이야기’로 수렴된다. 후대의 독자와 관객들은 호세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스토리를 따라가며 그가 살인을 저지른 사연에 감정이입하고 유혹자 카르멘을 질타한다. ‘저 요망한 여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착실한 군인으로 고향에 돌아가 순진한 아가씨와 결혼도 하고 어머니께 효도하며 살았을 텐데!’ ‘어쩌다 여자를 잘못 만나 살인자가 되었을까!’ 사람들은 호세의 기구한 운명에 혀를 차며 종종걸음으로 극장을 나선다.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관객들의 뇌리 속에서는 호세가 카르멘을 살해한 죄보다 카르멘이 호세를 유혹한 죄가 더 중하고 무겁다. 카르멘이 호세를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호세가 군대에서 탈영하지도,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 빈번한 ‘이별살인’의 원조 격인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죽음을 대하는 카르멘의 태도다. 첫 부분의 인용문으로 돌아가본다면 카르멘은 다가온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목숨을 잃을지언정 호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유로운 보헤미안’이었던 카르멘은 스스로에게 충실했지만 그가 그 자유로움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자신의 목숨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이 작품은 오페라로, 연극으로, 또 발레로 옮겨지며 널리 사랑받고 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호세의 심리에 천착하는 창작자들은 어쩐 일인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이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카르멘의 심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카르멘이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자유의 의미는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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