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여성캐릭터와 여성중심의 서사가 담긴 ‘여성영화’에 대한 목마름이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남성이 무리지어 나오고 남성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속칭 ‘알탕영화’에 지친 탓이겠지요. 이에 <여성신문>은 배우, 감독, 영화 제작자, 평론가, 영화인협회 등 영화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한국 영화판의 현황을 들여다보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천만 영화 15개 가운데

여성 캐릭터 내세운

작품은 하나도 없어

조력자나 희생자로만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연말을 맞아 각종 영화제가 열리는 가운데 올해의 천만 영화 ‘택시운전사’가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제 등에서 연이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2003년 ‘실미도’가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변호인’, ‘명량’, ‘베테랑’, ‘부산행’ 등 천만 영화는 꾸준히 탄생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면면을 한 번 살펴보자. 천만 영화 중 여성 캐릭터를 주체로 내세워 여성중심의 서사를 이끌어간 영화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안타깝지만 하나도 없다. 15개의 천만 영화(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4), 왕의 남자(2005), 괴물(2006), 해운대(2009), 도둑들(2012),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7번방의 선물(2013), 변호인(2013), 명량(2014), 국제시장(2014), 베테랑(2015), 암살(2015), 부산행(2016), 택시운전사(2017)) 모두 남성이 중추가 돼 극을 이끌어간다.

남성들이 무리지어 나와 남성중심의 서사로 진행되는 소위 ‘알탕영화’는 한국 영화판을 지배한 지 오래다. 떼를 이룬 남성 군집 속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서사를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여성 없는’ (남성)영화는 여성 착취와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묘사하고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여성이 주체로 등장하는 영화에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액션, 스릴러, 역사, 전쟁 서사 등이 없다고 여겨진다”며 “이러한 요소가 빠지면 ‘재미없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천만 관객을 목표로 하는) 감독들은 대개 남성 관객의 구미에 맞는 스토리텔링을 구사한다”고 진단했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명량’은 역사, 전쟁, 액션 등을 중점으로 한 영화이며, ‘택시운전사’ 또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그렸다. 이처럼 거대서사를 다루는 영화 속에서 행동하는 주체는 남성이며, 여성은 대개 조력자나 목격자 혹은 희생자로 묘사된다.

최근에는 스릴러 장르가 인기를 끌면서 사이코패스와 같은 안티소셜(antisocial·반사회적인)한 남성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물을 통해 영화는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함 등을 이야기한다고 심 평론가는 분석했다. 그는 “안티소셜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야기에는 주로 반여성적인 서사나 잔혹하고 불필요한 성폭력 장면이 등장한다”며 예로 영화 ‘브이아이피’를 들었다. 극중에서 배우 이종석이 맡아 연기한 김광일 역은 북한에서 온 연쇄살인범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고문·강간·살인을 벌인다.

올해 개봉한 국내 상업영화에서는 ‘악녀’, ‘아이 캔 스피크’ 정도를 제외하고는 여성중심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가 없으니, 여성 배우들의 배역은 절로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페미’를 만들어 활동 중인 배우 김꽃비씨는 “여성이라는 성별을 일반화시켜 ‘여성은 이럴 것이다’라는 편견에 기대 만드는 작품들이 많다.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여성혐오적인 내용”이라며 “여성을 고결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추앙하거나 질투심이 많은 인물 혹은 민폐캐릭터로 설정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성도 단점이나 부족한 점, 악한 부분을 갖고 있는데 그런 특성을 모두 가진 복합적인 인간으로 그려야 한다”며 외국영화 ‘미스 슬로운’, ‘고스트 버스터즈’, 국내영화 ‘비밀은 없다’, ‘땐뽀걸즈’ 등을 좋은 예로 꼽았다. 김씨는 “이 영화들은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극이 흘러가는데, 각각의 캐릭터가 특색을 갖고 있다. 또 그 특색이 ‘여성’의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좋았다”고 평했다.

상업영화를 제작하고 투자·배급할 수 있는 요직은 여전히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 감독·배우·스태프들의 목소리를 배제한 제작 환경에서 제대로 된 여성영화가 나올 리 만무하다. 성차별적인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영화판은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밖에 없다. 가장 적극적인 문화 향유층인 여성 관객이 남성영화에 의문을 갖고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 소비자인 여성관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