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명훈 (사)고창농악보존회 회장

“여자는 안된다” 통념 꺾어

전국 최고 규모 보존회 이끌어

연 3000명 전수관 찾아 

‘진정한 굿쟁이’ 거듭나고파

 

이명훈 (사)고창농악보존회 회장 ⓒ고창농악보존회 제공
이명훈 (사)고창농악보존회 회장 ⓒ고창농악보존회 제공
 

1991년 여름, 전라북도 고창군. 장구 하나 달랑 멘 20대 여성이 버스에서 내렸다. 한 시간을 걸어 찾아간 곳은 전북 무형문화재이자 고창농악 상쇠(농악대를 이끄는 사람으로 꽹과리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이 맡음)였던 고 황규언 선생의 집이었다. 이날 들은 소리가 그의 일생을 바꿨다. 

“72세의 할아버지가 장구를 그렇게 잘 치시는 겁니다. 선생님들 말씀대로 장구에서 콩 볶는 소리가 났었어요. 그 후 고창농악단 어르신 40여 분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새납,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잡색 등 모든 분들이 너무나 멋들어지게 잘 하시더라고요.” 

 

 

지난 10월 28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성 앞 잔디광장에서 열린 고창농악 문화재 발표회 현장. ⓒ고창농악보존회 페이스북 캡처
지난 10월 28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성 앞 잔디광장에서 열린 고창농악 문화재 발표회 현장. ⓒ고창농악보존회 페이스북 캡처

1985년 고창 농악인 40여명이 결성한 고창농악단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공연과 전승을 이어왔다. 뛰어난 실력으로 여러 대회도 석권했다. 1992년 전북 시‧군 농악경연대회 대상, 1994년 전국농악경연대회 대상, 1998년 전주 대사습놀이 농악부문 장원을 차지했다. 

고창농악단 공연에서 “풍물굿의 신천지”를 본 이명훈(50) (사)고창농악보존회장은 이렇게 좋은 가락과 장단을 잃어버릴 순 없다는 생각에 잠겼다. 안타까움은 사명감이 됐다. 1998년부터 할아버지 단원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고창농악에 대해 묻고 조사했다. 10년간 취재한 결실은 책 ‘고창농악’ ‘고창의 마을굿’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등이 돼 빛을 봤다. 2017년 11월 현재 생존한 원로회원은 10여 명뿐이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문굿, 풍장굿, 판굿, 도둑잽이굿, 구정놀이, 잡색놀이 등 전통 농악의 기초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존할 수도, 공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이 회장의 삶은 “고창농악을 이어받고 정리해 그 토대를 다지는 삶”이었다. “졸졸 따라다니면서 굿을 배우는 제게 어르신들은 무조건 ‘이쁘다, 잘한다’ 해 주셨어요. 당시만 해도 고창에선 할아버지들만 굿을 치고 다녔는데, 어린 여학생이 배우겠다고 하니 안 이쁠 수가 없었겠지요.” 

고창농악을 전수한 명인들이 잇따라 타계하며, 자연스레 그가 고창의 굿가락을 잇는 다리가 됐다. 고 황규언 선생 타계 이후 고창농악단 상쇠를 맡았다. 2007년 회원 만장일치로 고창농악보존회 대표가 됐다. 

 

이명훈 (사)고창농악보존회 회장이 2017 고창농악보존회 정기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고창농악보존회 제공
이명훈 (사)고창농악보존회 회장이 2017 고창농악보존회 정기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고창농악보존회 제공

원로들은 열의 넘치는 그를 고창농악의 명맥을 이을 차기 리더로 일찌감치 점찍었다. 그러나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심쩍은 시선을 받는 일도 더러 있었다. “2000년에 문을 연 고창농악전수관 관장직을 두고, 어르신들이 ‘명훈이는 시집가면 그만이여~ 오랫동안 고창에서 이것을 지킬 사람을 앉혀야 해~’라며 저를 배제하려 하시더라고요. 시집 안 가겠다고 약속하고 관장을 했죠. 지난해 결혼했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사명감이 그리 컸나 모르겠어요.”

그런 순간이 또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단체를 이끌다 보니, 위에 어른이 안 계신다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덕망 있는 지역 유지를 회장으로 모시려고 노력했는데요. 다들 거절하시더라고요. 나이 어린 여자가 회장을 했는데 그 뒤에 누가 회장을 하려고 하겠냐고…. 힘이 쫙 빠지더라고요.”

이 회장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창농악을 알릴 길을 개척해왔다. 2000년 폐교를 무상 임대해 고창농악전수관을 마련하며 대규모 전수의 길을 열었다. 지난해 새 전수관이 문을 열었다. 고창군이 조성한 풍물소리테마파크에 위치한 곳으로, 실내·야외 공연장, 고창농악 전시실, 연습실 등을 갖췄다. 규모로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이제 한 해 전수관을 찾는 인원이 3000명이 넘는다. 현재 보존회 상근 직원도 16명으로 늘었다. 

보존회는 그간 국내외 무대에서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지난해엔 주덴마크한국대사관 초청으로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공연을 펼쳤다. 판소리, 탈춤 등 여러 예술 양식을 결합한 작품도 꾸준히 선보였다. 지난해 공연한 ‘도리화 귀경가세’는 동리 신재효와 한국 최초 여성 명창 진채선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해 한국민속예술축제 초청작이다. 올해 작품인  ‘모양마을 사람들’은 어느 마을의 당산나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로, 2017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 초청됐다. 내년엔 고창농악과 고창농악의 잡색놀이가 잘 돋보이는 잡색극을 구상 중이다. 

“지난 30년 동안 쌓아 온 토대를 기반으로 고창의 전통문화예술발전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할 계획입니다. 체험, 공연, 강습을 통해 끊임없이 고창농악 마니아들을 배출할 겁니다. 학술적으로도 고창농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지난해 고창농악보존회가 선보인 작품 ‘도리화 귀경가세’. 그해 한국민속예술축제 초청작이다. ⓒ고창농악보존회 제공
지난해 고창농악보존회가 선보인 작품 ‘도리화 귀경가세’. 그해 한국민속예술축제 초청작이다. ⓒ고창농악보존회 제공

농악은 지난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전국에서 농악 무형문화재가 가장 많은 곳이 전라도다. 2015년부터 시·군별 농악 기록화 사업, 농악 전승 지정학교 운영, 보유자·보유단체 지원, 문화재 발표회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이 나왔다. 올해는 전라북도무형문화재연합회가 출범해 무형문화재 계승과 활성화도 기대된다. 현장에선 무엇이 가장 절실할까. 이 회장은 “장기적인 지원”을 주문했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일이니, 단기 지원으론 성과를 얻기 힘듭니다. 우리 곁에 있던 수많은 무형문화유산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장기 정책을 세우고, 그걸 행하는 이들이 자긍심을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해야 합니다.”

요즘 그의 개인적인 목표는 ‘진정한 굿쟁이’로 거듭나는 일이다. 이미 서울민속박물관, 서울국제무용제, 서울세계무용축제, 풍물 명인전 등 무대에 초대될 만큼 기량을 인정받았다. 그는 지난해 전북일보 인터뷰에서 “마흔을 넘기며 나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됐다. 이젠 내 굿을 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제 청춘을 바쳐서 선생님들의 굿을 잘 이어가기 위한 기반을 다졌으니,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선생님들처럼 멋지게 굿을 치는 연행자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야 후학들이 또 우리들을 이어받아 길을 가겠지요.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21일 한국문화의집KOUS 공연장에서 열린 ‘풍물명인전- 풍무전’에서 공연 중인 이명훈 (사)고창농악보존회 회장. ⓒ고창농악보존회 제공
지난 21일 한국문화의집KOUS 공연장에서 열린 ‘풍물명인전- 풍무전’에서 공연 중인 이명훈 (사)고창농악보존회 회장. ⓒ고창농악보존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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