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엘림/한국여성개발원 수석연구위원

최근 <남녀고용평등법 시행 10년의 성과와 과제>와 <20세기 여성인권법제사> 연구를 하면서 새삼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정도나마 여성인권을 보호하는 법과 사회환경을 가지게 된 데는 용기와 사명감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또한 여성인권과 평등사회를 이루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오늘과 미래의 씨가 될 것이라는 역사의식이다.

서구의 여성인권역사를 보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기본적 권리를 가진다는 근대 인권의 개념은 1789년 프랑스의 시민혁명이후 확립되었지만 여성에게는 참정권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그러자 올림프 드 구즈라는 여성정치가가 시민혁명의 인권선언이 여성의 인권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하고 여성도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일하게 공직 참여권과 재산권을 가진다는 점을 천명한 ‘여성의 권리선언’을 발표한 후 단두대에 처형당했다.

이 사건이후 미국과 영국 등에서 여성의 인권운동이 촉발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성차별소송은 헌법과 근로기준법에서 남녀평등원칙이 규정된 후 30여년 만인 1983년 1월초에 한 여성전화교환원이 여성들이 절대다수로 근무하는 전화교환원 직종의 정년을 다른 직종보다 12세나 낮게 정한 인사조치를 문제삼으면서 제기되었다.

소송제기자 자신은 원고승소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6년여간 많은 인내와 희생을 해야 했지만, 이 소송은 여성차별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고 다른 많은 여성들에게 정년연장 등의 혜택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우리 나라에서도 선진국과 같이 남녀고용평등을 구체적으로 보장하고 소송 대신 간편하면서 신속하게 권리구제를 할 수 있는 남녀고용평등법을 만들 필요성에 관한 공감대를 널리 형성하는 데 씨를 뿌린 공이 크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사용자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처벌받게 된 사건은 서울지역 여대생협의회가 병역필한 남자만을 뽑는다는 모집·채용광고를 낸 기업들을 고발한 것이고 그후 여성차별적 광고가 거의 사라졌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관한 특별법이 1994년과 1997년에 각각 만들어지게 된 것도 그동안 은폐되어 왔던 성을 이유로 한 폭력문제를 사회문제화시키고 피해자들의 고소와 소송을 지원, 촉발시켜온 활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1999년 7월부터 직장내 성희롱이 법적으로 규제되고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적으로 실시되게 된 데에도, 성희롱에 대한 사회인식이 희박했던 1993년에 서울대 조교였던 한 여성이 많은 사람들의 후원 속에 성희롱소송을 제기하고 1994년에 1심에서 원고승소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사회적 관심과 입법의 씨를 뿌린 결실이다.

가족법개정운동의 역사도 40여년이 넘었고 지금 호주제폐지운동으로 어어져 오고 있다.

어찌 그뿐이랴. 여성인권을 위한 모든 법과 소송에 피해자, 여성운동가, 연구자, 법조인, 국회의원, 공무원, 언론인, 기타 많은 사람들에 의한 귀중한 씨뿌림의 수고가 있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