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 30년, 용기와 연대의 기록] ⑧-1 호주제 폐지운동

범사회적 연대로 해결한

시민입법운동의 결정판

권위적 가부장제에서

평등한 사회로의 초석

 

2003년 호주제 폐지 평등가족 실현 시민한마당 ⓒ한국여성단체연합
2003년 호주제 폐지 평등가족 실현 시민한마당 ⓒ한국여성단체연합

2005년 3월 2일, 호주제가 폐지됐다. 반세기 여성운동의 숙원과제가 해결된 날이었다. 호주제 가 폐지됨에 따라 ‘호주(戶主)’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호적이 새로운 신분등록부로 대체됐다. 즉, 호주를 중심에 둔 가(家) 단위의 호적이 없어지고 국민 개개인별로 본인이 기준인이 되는 신분등록부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혼·재혼 가정 등 호주제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 살아가던 국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켰다. 또한 딸만 있는 수백만 가구의 서러움을 해소시켜 줬다. 1~2인 가구, 이혼·재혼 가정의 증가 등 다양해지고 있는 가족 형태에 적합한 방향으로 법개정이 이뤄졌다. ‘1인 1적 제도’는 개인별 신분등록제도라서 가족 형태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호주제 폐지는 우리 사회의 남성 우선적 관행들에 균열을 일으켜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가부장문화를 민주적이고 수평적 문화로 변화시키는 초석이 됐다.

 

2005년 4월 8일 호주제 폐지 자축 집들이 ⓒ한국여성단체연합
2005년 4월 8일 호주제 폐지 자축 집들이 ⓒ한국여성단체연합

성차별적이고, 인권침해적인 호주제

호주제 폐지 운동은 한국 여성운동 역사에서 시민입법운동의 결정판이었다. 장장 9년이나 계속된 호주제 폐지 운동은 여성운동사에서 유례가 드물정도로 전방위적 전략과 역량을 총동원한 운동이었다.

호주제 폐지 운동의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법률 기초작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문제연구원 등 여성단체와 종교단체들이 새 민법을 제정함에 있어 결혼, 친권, 상속 등과 관련된 여성의 법적 지위를 남성과 동등하게 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유림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그 후로 1989년까지 세 차례의 가족법 개정을 통해 호주의 권리와 의무 조항이 대폭 삭제되는 등 점진적 변화는 있었으나, 가부장제의 상징인 ‘호주(戶主)’조항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모든 국민은 출생하면서부터 개개인의 출생·혼인·사망·이혼 등의 신분 변동사항을 국가에 등록해 민법관계를 규율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호주제 폐지 전까지 ‘호적’이라는 신분등록부를 통해 이를 규율하고 있었다. 호적에는 가족의 신분 변동사항이 기록되는데, 이를 기록함에 있어 호적의 주인인 ‘호주(戶主)’를 정하고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의 신분 변동사항을 호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록하게 된다. 즉 호주를 뺀 나머지 가족들은 호주에게 입적되거나 제적되고 분가하는 등 호주와의 관계 속에서 종속적으로 기술되는 것이다. 딸이 결혼하면 친정아버지의 호적에서 제적되고 시아버지 또는 남편의 호적으로 입적이 돼 ‘호주의 며느리’ 또는 ‘호주의 처’로서 신분이 등록되는 식이다.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호주라는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가족들의 신분 변동사항을 기록한다는 이 단순한 기술방법에 성차별적이고 인권침해적인 가족법의 문제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2003년 7월 22일 호주제 폐지 국회 통과 촉구 결의대회 ⓒ한국여성단체연합
2003년 7월 22일 호주제 폐지 국회 통과 촉구 결의대회 ⓒ한국여성단체연합

99년 ‘호주제폐지운동본부’ 발족

호주제는 명목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고통을 주는 제도였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죄 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 재혼한 가족 안에서 새 아빠와 성이 달라 고통받는 아이들, 심지어 갓난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여성은 자식의 성을 새 남편의 성으로 바꾸기 위해 실종신고를 한 후 새 남편의 성씨로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성연합)이 개설한 ‘호주제 피해 및 불만 신고전화’에는 이러한 피해 사실들이 무수히 접수됐다.

호주제 존치를 주장하는 유림 세력의 반발이 아니더라도 호주제 폐지는 모든 국민의 가족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데다 오랜 관습을 변화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첨예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여성연합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연대체들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비롯해 시민사회, 언론,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움직이는 종합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여성연합은 1997년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선언하면서 호주제의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1999년 전국의 회원단체들과 ‘호주제폐지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각계각층의 연대를 모아나갔다. 2000년 9월에는 137개 여성·시민사회단체가 ‘호주제폐지시민연대’를 결성해 호주제 폐지 청원, 위헌소송 추진, 서명운동 등을 벌이면서 호주제 폐지 지지여론을 확산시켜 나갔다. ‘호주제폐지를 위한 종교여성연대’도 기자간담회를 열고 호주제 폐지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예술인들은 전국을 돌며 ‘딸들이 행복한 세상’이라는 노래극을 공연하며 지역사회의 여론을 변화시켰다.

 

2003년 11월 19일, 여성연합 평등가족 홍보대사 권해효 씨의 호주제 폐지를 위한 국회 앞 1인시위 모습. ⓒ한국여성단체연합
2003년 11월 19일, 여성연합 평등가족 홍보대사 권해효 씨의 호주제 폐지를 위한 국회 앞 1인시위 모습. ⓒ한국여성단체연합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았던 배우 권해효씨와 코미디언 김미화씨를 홍보대사로 임명해 그들의 목소리로 호주제 폐지를 국민들에게 알렸다. 다양한 퍼포먼스와 캠페인, 각종 여론매체를 활용해 호주제 폐지의 필요성을 널리 홍보했다. 또한 호주제 폐지가 남녀의 대결로 보이지 않도록 남성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조직했다. 호주제 폐지 1만인 선언, 딸사랑아버지모임 결성, 호주제 폐지를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의 성명서 발표가 이어졌고, 시민사회단체가 요구하는 ‘호주제 폐지’가 대선 핵심 공약에 포함됐다. 남성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남성과 연대해 호주제 폐지를 추진한 운동 방식은 호주제 폐지가 양성 간의 대결로 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 제출, 헌법재판소에 호주제 위헌법률 심판 제청 등 사법제도를 활용한 운동도 적극적으로 이어나갔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도 민관 합동의 ‘호주제폐지특별기획단’을 구성해 호주제 폐지를 위한 여론을 조성해 나갔다. 2004년 12월 공청회가 열리고 국회 법사위 1소위에서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을 통과시켰고,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국회 법사위는 2월 28일 전체회의를 열어 다수결로 호주제 폐지를 통과시켰고, 마침내 3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호주제 폐지는 국민들의 삶의 구체적인 변화를 넘어서 우리 공동체의 작동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데 그 근원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권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가부장문화를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치로 대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호주제가 폐지된 지 12년이 지난 2017년 현재, 우리가 바라던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는 얼마나 실현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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