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침묵’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침묵’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침묵’을 홍보하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벡델 테스트’라는 게 있다. 영화산업의 성차별을 지적하기 위해 고안된 테스트다. 세 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있어야 하고, 그녀들의 대화도 존재해야 하며, 그녀들만의 사연도 포함돼야 한다. 말하자면 ‘침묵’이 그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주요 캐릭터 중 두 명 이상이 여성인 것은 맞다. 그녀들 간의 대화 장면도 제법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사연이 자생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실상 그것은 남성의 초월적 권능 앞에서 무릎 꿇는다.

재벌 회장인 태산에게 불행이 닥친다. 약혼녀 유나가 살해당하고 유력한 용의자로 딸 미라가 지목된다. 막강한 재력의 태산은 악전고투 끝에 검사보다 먼저 사건 현장이 기록된 CCTV 영상을 확보한다. 영화는 해당 화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것과 마주한 오열하는 태산을 포착하며 진실을 환기한다. 딸이 약혼녀를 죽인 것이다. 아버지는 딸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로 결심한다. 태국으로 건너가 CCTV 화면과 동일한 거대한 세트장을 만들고는 그 안에서 살인자를 연기한다. 막대한 자금으로 제작된 진짜 같은 가짜 영상 앞에서 모두가 속는다. 태산은 기꺼이, 그리고 기어이 딸 대신 감옥에 갇힌다. ‘침묵’은 아버지의 희생에 관한 영화다.

의아한 것은 아버지의 희생이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걸 쌓아가는 과정에서 그것에 수렴되지 않는 불균질한 순간들을 처리하는 영화의 태도다. ‘침묵’의 여성들은 그리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미라는 재벌가의 철없는 딸 수준으로 간단히 환원되지 않는다. 사건 직후 구치소를 찾은 아버지에게 미라가 말한다. “병신 새끼, 걸레 같은 년이 뭐가 좋다고….” 약혼녀 유나 역시 명품 선물이나 좋아하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를 들추려는 약혼남의 딸을 향해 설득의 태도를 버리고 광기어린 욕설을 연달아 뱉을 때의 살기어린 눈빛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그녀들의 노골적이고 서슬 시퍼런 뉘앙스는 우리로 하여금 태산을 중심으로 결속된 질서를 초과하는 어떤 서늘하고 불온한 정념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CCTV 진본을 보여주지 않는가. 아니, 그것을 볼 공식적 권리를 왜 태산에게만 부여하는가. 바로 이 은근슬쩍 작동하는 비가시와 가시의 위계에 아버지의 희생이라는 이데아를 떠받드는 ‘침묵’의 진짜 욕망이 숨어 있다. CCTV의 원본은 단순히 철없는 딸이 유약한 약혼녀를 만취 상태에서 어쩌다 살해했다는 증거에 머물지 않는다. 비록 살인으로 귀결되지만, 그것은 아버지와 약혼남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딸과 약혼녀의 불균질한 정념이 강렬하게 충돌하는 시공간의 흔적이자, 돈으로 모든 것을 휘어잡는 남성이 짜놓은 강고한 질서를 찢고 나오는 어떤 무질서하고 돌발적인 약동의 지점이다. 아버지의 희생을 숭고하게 떠받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감춰야 하는, 혹은 아버지에게만 보여줘야 하는 거세의 지점이다. ‘침묵’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남성적 질서’를 재고하는 대신, 그것보다 강력한 ‘남성적 질서’를 다시금 구축해 어떻게든 구멍의 흔적을 봉합하려는, ‘남성적 질서’에 대한 무한 긍정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핵심 설정은 살인도, 거듭되는 반전도, 아버지의 속죄도 아니다. 그것은 얼핏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태산에게 부여된 재벌 회장이라는 권능이다. 사실상 ‘침묵’은 그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영화에 불과하다. 영화가 부여한 초월적 권능 덕분에 성립된 남성의 전지전능한 전략 앞에서 여성들의 불균질한 정념은, 그 균열의 흔적은 말끔하게 제어된다.

미라는 태산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빈다. 유나는 놀랍게도 태산의 환상으로 부활해 미안해하는 태산을 도리어 “괜찮아…”라며 위로한다. 이것은 주체적인 결정이 아니다. 초월적 아버지의 반성, 속죄, 희생을 따르는 것 외에 그녀들에게 허락되는 길은 없다. 그녀들의 몫은 오로지 용서할 수밖에 없고, 환상으로 부활해서까지 위로할 수밖에 없는 굴종적인 예단의 자리인 것이다. 물론 태산은 인자한 사람이다. 중년 남성의 품격 자체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 역시 권력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점이다. 그 인자한 미소는 규제하고 탄압하는 대신 양육하고 사육하는 ‘케어(care)’로서의 권력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태산은 이미 성인인 미라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연신 말한다. 남성의 품격 있는 케어 앞에서 여성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리하여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아이로 고정된다. ‘침묵’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홍보 문구는 거짓이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우성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했고 영화전문지 ‘무비위크’와 ‘매거진M’에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다. 이창동 감독 연구로 영화학 박사를 받았고 저서로 『신화의 탄생과 비극』(공저), 『영화언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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