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안에서 여성은 여전히 상징적 소멸 상태다. 대중매체 속 여성은 거의 보이지 않거나 힘이 없는 존재 혹은 혐오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특히 한국 드라마는 여성 묘사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폐습을 답습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거세게 불어 닥친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으로 대중은 여성혐오를 널리 인식하게 됐고, 미디어 속 여성혐오는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 성역할 고정관념,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적인 상황 설정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다. 그러나 제작자들의 인식은 더디다. 시청자들의 요구에 귀 닫은 채 언제까지 ‘스튜핏(stupid)’한 콘텐츠만을 생산해낼 것인가.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지난 10일 2회 방영분을 통해 성폭행 미수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영상 캡처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지난 10일 2회 방영분을 통해 성폭행 미수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영상 캡처

강간 미화-tvN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여성 캐릭터에게 닥친 위기·고난을 표현하기 위해 드라마는 종종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을 그리곤 한다.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도 그랬다. 드라마는 지난 10일 2회 방영분을 통해 성폭행 미수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극중에서 조감독으로 등장하는 남자캐릭터는 드라마 보조 작가 윤지호(정소민)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한다. 남자의 힘에 눌려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지호의 모습을 카메라는 여과 없이 담아냈다.

시청자들은 분개했다. “강간 미수 장면을 드라마 전개용으로 가볍게 그렸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한 누리꾼은 “주인공의 절박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선택한 게 강간미수냐. 여배우를 꼭 눈요깃감으로 연출해야 하나. PD와 작가 둘 다 게으르다”고 일갈했다.

tvN 드라마 트위터 공식 계정은 이에 기름을 부었다. SNS 계정은 지난 10월 11일 ‘혈압상승주의. 나 진짜 잠 좀 자자… 이 나쁜 놈아!’ ‘할말하않’ ‘눙물주의’ 등의 가벼운 말투로 해당 장면을 소개해 논란을 일으켰다. 누리꾼들은 “이건 ‘할말하않’이나 ‘눙물주의’로 퉁칠 장면이 아니다. 강간미수 장면을 홍보용으로 가볍게 쓰다니 화가 난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또 “방송에서 성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다루니 강간범부터 법원까지 강간과 성추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강간 피해자 조롱하는 것도 아니고, 강간(미수) 범죄 직접 묘사하는 장면 좀 넣지 말길. 간접적이거나 상징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데 굳이 그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고 비판했다. 

 

tvN 드라마 ‘변혁의 사랑’은 지난 14일 첫 회 방영분에서 신체접촉을 웃음 유발 장치로 이용했다. ⓒtvN 드라마 ‘변혁의 사랑’ 영상 캡처
tvN 드라마 ‘변혁의 사랑’은 지난 14일 첫 회 방영분에서 신체접촉을 웃음 유발 장치로 이용했다. ⓒtvN 드라마 ‘변혁의 사랑’ 영상 캡처

성추행 희화화-tvN 드라마 ‘변혁의 사랑’

성추행을 유머로 소비하는 것도 문제다. tvN 드라마 ‘변혁의 사랑’은 지난 14일 첫 회 방영분에서 신체접촉을 웃음 유발 장치로 이용했다. 남자주인공 변혁(최시원)은 술 취한 채 기내에서 난동을 부리다 승무원 하연희(김예원)에 의해 제재 당한다. 그 과정에서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리고, 혁은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다 연희의 가슴 위에 두 손을 올린다. 카메라는 여자의 가슴과 남자의 손을 클로즈업하고, 이어 여자는 경악한다. 드라마는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치심이나 모욕감은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듯 해당 장면을 웃음 코드로 소비한다.

시청자들은 “저런 장면을 우스개로 소비하니 남자들이 성추행을 가벼이 취급하는 것”이라며 불쾌해했다. 또 “안 그래도 승무원 대상으로 성희롱 많은데 굳이 저런 상황을 설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누리꾼들은 “비행기 난동 미화하는 것 아닌가” “비행기가 흔들렸다고 승무원 만지고 껴안아도 되나. 작가가 평소에 성추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고 지적했다.

해당 장면을 자극적인 기사거리로 이용하는 언론사의 태도도 도마에 올랐다. 모 매체 등은 <‘변혁의 사랑’ 최시원, 김예원 가슴 만졌다가 테이저건 맞아…‘폭소’> <‘변혁의 사랑’ 최시원, 비행기서 난동부리다 김예원 가슴 만졌다>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써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KBS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은 “이게 여자야? 초딩이지” “이제 멋도 좀 부려, 여자처럼” 등의 대사를 통해 성별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 ⓒKBS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영상 캡처
KBS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은 “이게 여자야? 초딩이지” “이제 멋도 좀 부려, 여자처럼” 등의 대사를 통해 성별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 ⓒKBS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영상 캡처

성별 고정관념-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성별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것도 여전하다. “네가 여자냐? 좀 꾸미고 다녀” “남자는 자고로 ~해야지” 등의 대사는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 

KBS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에서 서지수(서은수)와 막내 남동생 서지호(신현수)는 큰오빠 서태수(이태성)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다 대화주제를 ‘연애’로 튼다. 그리고 지호는 지수에게 말한다. “연애해본 여자는 절대 그렇게 양갈래 머리 못해. 그것도 꼬불꼬불.” 빵집에서 일하는 지수는 평소 수수한 차림에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묶고 다닌다.

지수가 “양갈래 머리가 어때서. 이게 별로냐”고 묻자 지호는 “이게 여자야? 초딩이지”라고 답한다. 이에 지수는 “여성스럽지 않다는 얘기지?”라며 시무룩해한다. 옆에 있던 엄마(김혜옥)도 한 마디 거든다. “그래, 이제 멋도 좀 부리고 해. 여자처럼.” 이어 오빠의 결혼식 날 머리를 풀고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한 지수를 본 빵집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좀 사람 같네. 예전에는 여잔지 남잔지, 말하는 고양이인지 강아지인지 몰랐는데.” 

‘여성스럽다’ ‘여자처럼’이라는 말은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표현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전통적 젠더 프레임 안에서 바라본 여성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판 요소가 다분하다. 편향된 이미지를 여성의 것으로 고착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사회는 ‘여성스러움’을 ‘다소곳함, 차분함, 예쁨, 성숙함’ 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성별 이분법을 강화해 편견을 조장한다는 지적이다. 

 

여자주인공 이현수(서현진)는 자신의 처지에 힘들어 속내를 털어놓으면서도 이내 “안 돼, 이거 여자 짓이야”라고 자기검열을 하며 상대방을 밀쳐낸다. ⓒSBS 드라마 ‘사랑의 온도’ 영상 캡처
여자주인공 이현수(서현진)는 자신의 처지에 힘들어 속내를 털어놓으면서도 이내 “안 돼, 이거 여자 짓이야”라고 자기검열을 하며 상대방을 밀쳐낸다. ⓒSBS 드라마 ‘사랑의 온도’ 영상 캡처

‘여자 짓’이 뭔가요?-SBS 드라마 ‘사랑의 온도’

하던 일이 틀어져 힘들어하는 여자주인공 이현수(서현진)에게 남자주인공 박정우(김재욱)는 이렇게 묻는다. “여자 짓 하는 거야?” 현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온정선(양세종) 앞에서 속내를 털어놓으면서도 이내 “이거 여자 짓이야. 이 상황에서도 여자 짓을 한다, 내가. 위로 받고 싶어서”라며 눈물을 애써 참는다.

이에 시청자들은 “힘들어 우는 것,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것을 왜 ‘여자 짓’으로 총칭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해당 방송 이후 시청자 게시판에 관련 글이 쏟아졌다. “감정 표현을 하는데 여자, 남자가 어디 있나. 힘들어 남에게 잠깐 기대는 것에 왜 굳이 특정성별을 들어야 하나” “여자 남자 구분 짓는 것 좀 그만하길” “질질 짜는 건 여자 짓, 여자에게 잘해주는 건 남자 짓?” 등의 반응을 보였다.  

“성역할 고정관념 조장 등 성차별 드라마 여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원장 민무숙·이하 양평원)이 ‘2017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사업 일환으로 서울YWCA와 함께 TV 드라마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한 결과 드라마 속 성차별적 내용은 총 31건으로 성평등적 내용(9건)의 3배 이상이었다.

양평원은 지난달 1~7일까지 방송된 지상파 3사와 종합편성채널 1사, 케이블 2사의 드라마 프로그램 가운데 방송사별 시청률 상위 프로그램 22편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과 “성역할 고정관념을 조장하거나 여성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남성에 대한 의존성향을 강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