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는 사건 당한 주체이자

그 여파 위에 살아야 할 주체

당사자들은 세상을 향해

“내가 피해자다”라고 말하고

싶은 열망이 있고, 필요가 있다

 

 

2주 연속으로 팔자에 없는 기자회견을 했다. 하나는 연예인이 피해자인 성폭력 사안의 피해자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예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성폭력 사안이었다. 한 사건은 안타깝게도 가해자가 처벌받지 못했고, 다른 한 사건은 다행스럽게도 피해자가 처벌받지 않았다. 두 사건 모두 피해자가 사건 자체로 입은 상처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세간의 오해와 선입견 속에서 깊게 상처받아야 했다.

법정이 늘 피해자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가해자를 국가사법권을 발동시켜 처벌해주지는 않는다. 꽤 많은 사건은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사건에 대해 재판이 이뤄지는 과정만으로 위안받으며 마무리되기도 한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재판을 통해 억울함이 소명돼서 가해자가 처벌이된 사건의 피해자들을 부러워하는 이상한 부러움도 존재한다.

그런데 막상 억울함을 소명 받은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법원이 그 사건에서 당신이 피해자라고 말해줬다는 것으로 그간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거나 완벽하게 위로받지는 못한다. 꽤 많은 피해자가 억울한 입장을 인정받은 재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밀려드는 헛헛함과 슬픔을 경험한다. 재판이 끝났을 뿐 그간 뒤집어쓴 오명이나 뒤죽박죽된 일상이 올곧이 돌아오지 않음을 만나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피해자라고 명명됐든 아니든, 피해자에게는 이제 다시 열심히 재건해야 할 삶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사건을 당한 주체이기도 하고, 사건이 끝난 후에도 그 사건의 여파 위에 살아야 할 주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당사자들에게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자신이 당한 끔찍한 사건이 자신이 잘못된 사람이라서가 아닌데 세상이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이다. 그중 가장 힘든 상황은 피해자가 ‘꽃뱀’이라는 낙인이다. 법정이 그렇게 말해줬지만 자신의 주변이나 세상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피해자를 다시 한번 좌절시키고 외롭게 만든다. 최근 불거져 나온 해시태그 운동 등 성폭력 피해 폭로의 움직임들은 단순하게 법이 멀고 주먹이 가까워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피해를 당한 당사자에게는 그런 좌절과 외로움이 만든 울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피해 당사자가 유명인이거나 유명인으로부터 가해를 입은 경우 더욱 증폭된다. 그래서 당사자들은 세상을 향해 “내가 피해자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열망이 있고, 필요가 있다.

당사자의 말 하고 싶은 열망과 말해야 하는 필요를 담아내보려고 팔자에 없는 기자회견은, 준비하는 내내 주변의 이런저런 말들로 불안했고 진행하는 순간마다 긴장됐다. 다행히 열망과 필요가 잘 전달된 후 세상이 ‘피해자구나’ 봐주고 떠들기 시작했고, 그제야 피해자들이 법정의 다른 결과에 상관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기자회견이 다 끝나고 정작 나는 후두염으로 말문이 막혔고 몸살로 앓아누웠다. 그런 주말이 지나고 쉰 목소리로 엉금엉금 사건들을 들여다보는 새 주에, 끝난 사건의 당사자들이 또 하고 있는 사건의 당사자들이 말을 걸어왔다. 대신 시원했다, 고맙다고. 내가 고맙고 기운 나는 말들을 들여다보다가, 다르게 목이 메어온다. 피해자들의 말할 권리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 법이 고민할 지점이 많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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