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환승 미노아아트에셋 대표

월가에서 일하던 금융맨 출신

‘좋아서 하는 일’ 하고 싶어

사표 내고 전시기획 뛰어들어

세계적 그래피티 작품 모은 

‘위대한 낙서’ 기획

하루 2600명 관객 몰려 

“작은 것이라도 ‘오리지널’

갖고 있으면 경쟁력 가져”

 

최환승 미노아아트에셋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환승 미노아아트에셋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2년간의 금융계 삶을 마무리하고, 돌연 문화예술계의 길로 들어선 이가 있다. 바로 최환승(53) 미노아아트에셋 대표다. 그는 거리의 낙서라 불리는 그래피티를 국내 처음으로 미술관 안에 들여왔다.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들을 한데 모은 단체전 ‘위대한 낙서’가 그의 첫 기획 전시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도 유례없는 ‘새로운’ 전시로 그는 혜성같이 등장했다.

금융계와 미술계. 언뜻 보기에도 둘 사이에선 연결지점을 떠올리기 힘들다. 최 대표는 그 사이의 간극을 뚫고 어떻게 금융맨에서 미술전시기획자가 될 수 있었을까. 지난 19일 그를 여성신문 본사에서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최 대표는 대학 졸업 후 26살, 1994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MBA(경영학석사)를 마친 후 미국과 한국에서 22년을 금융계에 종사했다. 세계금융시장 중심지인 월가에서 일해 온 그는 귀국 후 보험사 임원을 역임했다. “일은 보람 있었지만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했다”는 최 대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게 시작하더라도 선도할 수 있는 분야에 뛰어들고 싶었어요. 문화·아트가 경제 산업이나 우리 삶을 이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죠. 그래서 뛰어들었어요. 겁이 없었죠. 만약 그쪽 사정을 너무 잘 알았으면 도전을 못했을 거예요.”

 

최환승 미노아아트에셋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환승 미노아아트에셋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보험사 임원으로 정년을 앞두던 그는 퇴사를 선언했다. 주변에선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왜?”라고 묻는 이도 많았다. 그는 답했다. “인생의 후반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고. 인생 회로의 열쇠를 쥔 그의 눈에서 빛이 났다. 2015년 미노아아트에셋을 설립하고 그는 전시기획자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아트 쪽에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정말 즐거웠어요. 평생 살아오며 스스로 좋아서 한 공부는 이번이 처음이었죠. 처음엔 호기심을 갖고 그래피티 자료들을 찾아봤어요. 그러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기저기 직접 찾아다니기도 했죠.”

그렇다면 왜 ‘그래피티’였을까?

“정말 새로운 분야의 것을 파고들고 싶었어요. 당시만 해도 그래피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뉴욕에서 일했을 때 지하철 낙서를 많이 봤었죠. 당시에는 빈민가에 그런 낙서들이 많았어요. 스프레이나 물감으로 칠해놓는 걸 ‘문화파괴’ 행위라고 생각해 그래피티는 범죄로 취급됐었죠. 그런데 시간이 흘러 지금은 디자인으로도 사용되잖아요. 참 신기했죠.”

그는 “그래피티를 미술계의 힙합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랩이 처음 나왔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저게 무슨 음악이야?’라는 반응을 보였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힙합문화가 주류로 자리 잡아 산업적으로도 엄청 발전했죠. 아류가 메인으로 등장한 거예요. 그런데 국내에서 힙합 음악은 보편화된 반면 그래피티는 아직 새로운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저 분야를 더 탐구해 한국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는 “고흐나 피카소처럼 유명한 작가의 그림을 가져와 보여주는 일반적인 전시 기획은 싫었다”고 했다. 새로운 장르의 문화콘텐츠를 개척하고 싶었다. 자신만의 전시 브랜드를 만들어 오래 지속·발전시키는 게 목표였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존원(JONONE)의 작품
그래피티 아티스트 존원(JONONE)의 작품

최 대표가 방점을 두는 것은 ‘새로움’이다. “작은 것이라도 ‘오리지널’을 갖고 있으면 경쟁력을 갖게 되죠. 선진국에서 잘 된 걸 갖고 와 벤치마킹하는 건 하기 싫더라고요. 완전히 새로운 걸 제작하거나 정말 새로운 콘셉트를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한국적인 것, 미국적인 것, 유럽적인 것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새로운 콘텐츠, 트렌드를 이끌어나갈 콘텐츠를 만들어야 해요.” 국경의 장벽이 무너진, 세계가 마치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돌아가는 글로벌 시대에 주목해야 할 점이다.

최 대표는 전시를 열기 위해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해외에서도 그래피티 작가들의 단체전은 보기 힘들다. 자유로운 성향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대부분 다른 작가와 공동 작업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팝아트 이후 세계 미술을 선도하는 그래피티 장르의 최전선에 위치한 세계적인 작가들을 모으는 것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그래피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국에서 그들의 단체전을 연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 대표는 진심을 갖고 작가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자금이 별로 없다’, ‘당신이 도와줘야 할 수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전시 의도와 그 가치를 설파했죠. 미국이나 유럽에도 유례가 없는 전시를 한국에서 하고 싶다고 진심을 전했어요. 결국 작가들이 흔쾌히 허락해줬죠.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힐링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데에도 자부심을 갖고 있더라고요. 일본이나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한다는 호기심도 있고.”

‘위대한 낙서’ 1차 전시를 준비하는 데만 1년 3개월이 소요됐다. 7명의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한데 모인 대형 전시였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위대한 낙서전’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시회에 관객이 넘쳐난 건 아니었다. 전시 초반에는 하루 방문객이 2~30명에 그칠 정도였다. “지난해 9월부터 전시 홍보를 했는데, 그때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터진 때였죠. 그래서 대중들이 문화에는 관심을 덜 가지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입소문을 타더니 하루 단일 관객수가 2600명에 이르렀다. 그 분위기를 이어 지난 3~4월에는 ‘위대한 낙서 셰퍼드 페어리 전-평화와 정의’를 선보였다. 현재는 대구 MBC 특별전시장에서 전시를 펼치고 있다.

최 대표는 “전시는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과도 같다”고 했다. “전시 기획에는 인력이 굉장히 많이 투입돼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펼쳐지거나 장애물이 발생하기도 하죠. 작가의 작업 활동, 전시장에서의 현장 공연, 공연가 섭외, 관객 안전 문제, 음향 확인, 조명 설치, 방습, 작가 인터뷰 일정 확인 등 하나에서 열까지 다 신경 써야 해요. 또 작가 개개인의 기분과 자존심, 고집도 헤아려야 하죠.” 그러면서 그는 전시 기획과 영화 제작의 다른 점을 한 가지 꼽기도 했다. “영화 제작은 감독에게 자율권이 부여되지만, 전시기획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대체로 작가들의 의견을 반영해줘야 하기 때문이죠.”

최 대표는 앞으로 작가 구성에 변화를 주면서 ‘위대한 낙서’ 전을 발전시켜나갈 예정이다. 이밖에 다른 전시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내년부터는 공연도 기획할 생각이다. “저비용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데 골몰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맨해튼의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국내로 들여와 키우는 거죠. 그래서 해외로 역수출하는 거예요.” 최 대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국내 작가들을 해외에 진출시키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인터뷰 내내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계속 제조업을 갖고 경쟁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많아요. 물건을 만드는 공장을 아트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해요. 박물관, 미술관을 ‘굴뚝 없는 공장’이라고 칭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실제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영국에선 본래 공장이었던 곳을 미술 전시관으로 많이 활용하고 있어요. 지금 세계적으로 ‘문화 아트 전쟁’이 벌어지고 있죠. 한국은 굉장히 발전된 나라인데 문화예술 분야에선 후진국이에요. 현재는 선진국이 만든 걸 소비하는 것에 그치고 있어요. 문화로 통하는 브랜드, 창의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해요. 문화와 아트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좀 더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서로 공감대를 나누고 교류를 해야 해요. 어른 세대가 젊은 층의 관심 분야를 따라간다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배우는 자세를 갖는 것도 중요하죠.” 

 

그래피티 아티스트 퓨어이블(Pure Evil)의 작품 ‘The Last Marilyn’
그래피티 아티스트 퓨어이블(Pure Evil)의 작품 ‘The Last Marilyn’

문화예술이라는 세계에 뛰어들어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그에게, 앞으로 도전을 앞두고 있는 이들을 위해 조언을 구했다. 잠시 웃음을 짓던 그는 말문을 열었다. “저는 제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제 마음대로 살아보지를 못했어요. 물론 작은 부분에서는 제 삶이 있었지만, 큰 틀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마음이 컸죠. 내 마음 속 우선순위대로 삶을 살아가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각자가 자신만의 우선순위가 있는데 우리는 ‘국가에 충성하라, 부모에 효도하라, 조직에 순응하라’는 말을 듣고 살죠. 그러다 보니 자기를 잃어버리게 돼요. 이제 우리나라도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어요.”

 

최환승 미노아아트에셋 대표

△1990년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1994년 뉴욕 아델파이 경영대학원 졸업/경영학석사

△1994년 뉴욕 에퀴터블 금융컨설턴트

△1998년 AXA 그룹 지역매니저

△2000년 AXA 뉴저지주 지점장

△2002년 AXA 북동부지역 부사장

△2004년 한국 알리안츠생명 상무

△2005년 Nationwide Financial 뉴욕 맨해튼 지점장

△2007년 한국 삼성생명 전략채널본부 근무

△2009년 한국 알리안츠 PA채널 총괄 임원

△2015년 미노아아트에셋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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