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에 밀려 성평등 개헌 뒷전에

성평등권, 별도 조항으로 포함돼야

 

 

 

정치권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둘러싸고 격돌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의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부싸움 끝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글을 올리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비난 여론이 커지자 정 의원은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반박이지 노 전 대통령과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려던 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박 시장은 최근 이명박(MB)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개입된 ‘박원순 제압 문건’과 관련해 MB를 고발했다. 그러면서 “내가 아는 최대 정치 보복은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정 의원의 글은 여당이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이명박 죽이기’를 위한 정치 보복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도적(?)인 반발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의 장남 노건호씨는 서울중앙지검에 정진석 의원을 명예훼손과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조사해 달라고 고소장을 제출했다. 건호씨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고인을 욕보이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며 “아버님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계속 현실정치에 소환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왜 한국 정치에서는 정권이 교체되면 이러한 정치 갈등이 끊임없이 재연되는 것일까? 권력을 잡은 세력이 국정원, 검찰 등 국가 권력 기관을 끌어들여 상대 진영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MB는 대통령 당선자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만나 “대통령직에 대한 권위와 신뢰를 지키는 데는 도움을 드리겠다”고 했다. 또한, “후임자가 전임자를 예우하고 잘 모시는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불법 정치 자금 수수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친노 세력은 MB가 정치 보복으로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굳게 믿었다. 여당은 “권력을 남용해서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치는 적폐는 청산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야당은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을 둘러싼 프레임 전쟁에만 빠져 있다. 헌법 제90조 1항에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 2항에는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된다”고 규정돼 있다. 만약 권력을 잡은 세력이 이런 헌법 정신을 지킨다면 한국 정치에 더 이상 정치 보복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이 이런 죽기살기식 정쟁에 빠져 있는 가운데 정작 중요한 개헌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특히 성평등과 관련한 논의는 우선순위에서 멀어지고 있다. 중앙일보 여론조사 결과, 내년 6·13 지방선거 때 헌법 개정안을 동시에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에 대해 국민 78.4%, 국회의원 88.8%가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에 개헌이 이뤄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이번 개헌에서는 반드시 성평등권 조항이 포함돼야 한다. 프랑스는 1999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남녀동수 공천에 대한 근거 규정을 만들었다. 헌법 제1조 2항에 “법률은 남성과 여성이 선출직 및 그 임기 그리고 직업적, 사회적 책무에 동등하게 접근하도록 한다”고 돼 있다. 독일 기본법 제3조 2항엔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가 실제적으로 실현되도록 지원하고 현존하는 불이익이 제거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돼 있다.

현행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만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이번 개헌에서는 최소한 프랑스 헌법과 독일 기본법에서 담고 있는 성평등권이 별도 조항으로 포함돼야 한다. 국회 개헌 특위 여성 의원들이 투철한 젠더 의식을 갖고 분발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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