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 부인 레이코 가부라키 리씨

‘뜨개질 공방’ 마련해 빈민 여성들 자립 지원

72년 일본서 한국 건너와

5년간 한센병 환자 돌보다

남편 고 이종욱 사무총장 만나

페루 여성들 자립 위해

지속적인 판로 확보 필요

 

레이코 가부라키 리씨는 2002년부터 페루 카라바이요에 뜨개질 공방을 열어 빈민 여성의 자활을 돕고 있다. 그는 “여성들이 아이들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탬이 되주고 싶어 공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레이코 가부라키 리씨는 2002년부터 페루 카라바이요에 뜨개질 공방을 열어 빈민 여성의 자활을 돕고 있다. 그는 “여성들이 아이들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탬이 되주고 싶어 공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무헤레스 우니다스(Mujeres Unidas)’. 페루 수도 리마 북쪽의 가난한 마을 카라바이유에 있는 뜨개질 공방의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여성 연대’라는 뜻의 이곳에서 여성 11명이 옹기종기 모여 뜨개질을 한다. 이 여성들이 알파카 털로 만든 머플러와 모자 스웨터, 판초는 세계 곳곳으로 팔려 나간다. 레이코 가부라키 리(72)씨는 이곳에서 15년째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며 자활을 돕는다. 재료인 알파카 털을 구입하고 세계 곳곳에 판로를 만드는 일도 그의 몫이다. 레이코씨는 2002년부터 빈민촌인 카라바이유에 공방을 만들고 페루 여성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그곳 여성들은 그를 가리켜 ‘카라바이요의 천사’라고 부른다. 일가재단은 15년째 페루 카라바이요의 가난한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 그를 27회 일가상 사회공익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 수상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기대하지 못한 일”이라면서 “일 때문에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상금을 주신다는 말에 ‘조금 괜찮아지겠구나’하는 그런 기분”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최근 공방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그 가족들의 병원 진료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는데 상금으로 지원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레이코씨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봉사에 헌신하는 삶을 사는 데는 그의 남편 고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영향이 크다. 이 총장은 2003년 7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국제기구의 수장으로 선출돼 지구촌 질병전쟁을 진두지휘했으며 봉사하는 삶으로 ‘아시아의 슈바이처’로도 불렸다. 이 총장은 사무총장 재임 중이던 2006년 5월 뇌중풍(뇌졸중)으로 별세했다.

레이코씨가 남편 이 총장을 만난 건 1976년 안양시 나자로마을에서다. 72년 대학 석사과정(영문학)을 마치고 한국에 온 그는 나자로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도우며 봉사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일본의 고아원에서 일하다가 건너온 것이다. 당시 ‘한국에 가면 내 딸이 아니다’라는 만류하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택한 한국행이었다. 레이코씨는 “나자로마을 소식을 접하고는 꼭 가야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처음 도착한 한국은 정말 몹시 추웠다”고 회고했다. 그곳에서 서울대 공대를 나온 뒤 다시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후 봉사하던 이 총장을 만났다. 레이코씨는 “이런 곳에서 봉사하는 의대생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그 해 겨울 부부의 연을 맺었다.

 

레이코씨는 행복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을 통해 조금씩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늘어가니까 그걸 보기만 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레이코씨는 행복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을 통해 조금씩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늘어가니까 그걸 보기만 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결혼 후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야하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 “한국에서 배우자 비자를 내주지 않아 남편, 어린 아들과 떨어져지내야 하는 게 힘들었어요.” 힘이 드는 건 이 총장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유학은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하와이로 유학을 결정하면서 두 사람은 본격적인 해외생활을 시작했다. 하와이대에서 보건학 박사를 받은 이 총장은 결핵과 한센병 전문의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83년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을 맡게 되면서 WHO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레이코씨는 살림을 하면서도 틈틈이 봉사활동을 희망했다. 어릴 적 수녀가 되려고 교육을 받았고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 봉사를 해온 그였다. 그러다가 다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게 지난 2002년이었다. 당시 WHO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던 이 총장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스위스 제네바 집에는 레이코씨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제네바에서 불어를 배우고 불문학 공부를 했지만 눈이 나빠 오랫동안 책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혼자 있는 시간도 힘이 들고 책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이렇게 해선 도저히 못살겠다 싶었죠. 아프리카에 가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남편에게 내 생각을 전하니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것 같아요. 위험하다고 만류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계속 밀어붙이니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결국 페루를 추천해주더군요. 평소 친분이 있던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추천해준 곳이라고요.”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한번 마음먹으면 해야되는 성격”이라며 “동생조차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남의 생각은 안한다고 불평할 정도라고 한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레이코씨는 2002년 남편이 있는 제네바를 떠나 페루 리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결핵환자를 지원하는 비정부 의료지원단체 소시엔살루(Socios en Salud)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현지 여성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간단한 영어단어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고, 수업 중에 걸려오는 전화들로 수강생들이 수업에 빠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영어교육이 아니라”는 판단에 눈을 돌린 게 뜨개질이었다. 당시 소시엔살루에서 여성들에게 클레이 장식과 양초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판매하고 있었는데 수익이 나지 않았다.

“클레이 장식과 양초는 너무 흔하고 무거워서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불쌍해 조금씩 사는 게 전부였어요. 그러니 수익이 나기 힘들었고요. 그래서 뜨개질과 수놓는 법을 가르쳐 머플러와 스웨터를 만들어 팔자고 생각한 거죠.”

이들이 만든 제품은 페루 국외로 수출됐다. 첫 해에는 1인당 10달러도 채 벌지 못했지만 매년 조금씩 매출액이 늘고 있다. 재료비를 제외한 판매 수익금은 생산한 제품의 양과 질에 따라 분배된다. 여성들은 이 돈으로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에 보태고 있다.

페루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는 부부들이 많다. 남편이 바람이 나고 딴 살림을 차려도 법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여성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사는 가구도 상당한데 이들은 제대로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대부분 빈곤하다. 레이코씨는 “여성들이 아이들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탬이 되주고 싶어 공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초기에는 평범한 실과 옷감을 사서 머플러를 짜고 수를 놓았지만 별다른 수익을 얻기 힘들었다. 그 뒤 페루 특산물인 알파카 털실을 접하고는 시도했지만 처음부터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긴 어려웠다.

“일반 실로보다 비싼 알파카 털실은 다루기가 쉽지 않았어요. 완성된 제품도 까끌까끌해 목에 두르기 어렵더라고요. 차차 알파카에 대해 공부하면서 익숙해지면서 제품의 질도 좋아졌죠.”

제품을 어렵사리 완성했지만 그 뒤가 더 문제였다. 많은 제품을 판매할 판로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품의 질이 좋아지면서 매출도 늘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만든 물품이 제네바 WHO본부의 바자, 일본 여자대학 축제, 미국 하버드대 NGO 사무실을 통해 판매했다. 그러자 1인당 10달러도 채 안되던 매출액이 다음해 150만원, 200만원으로 점차 늘었다. 100% 알파카 머플러 제품이 특히 인기다. 한국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찾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속적인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알음알음으로만 판매되고 있다.

 

레이코 가부라키 리씨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레이코 가부라키 리씨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레이코씨는 두 가지 꿈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젊은 사람들이 좋은 직장을 갖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공부를 지원해주는 것, 또 하나는 카라바이요의 여성들 뿐 아니라 자녀들과 가족들이 아플 때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기에 그에게 지속가능한 판로 마련은 절실하다고 했다. 다행히 사단법인 국제한인간호재단이 코이카(KOICA) 민관협력사업으로 공장이 있는 카라바이요 지역의 가족과 청소년을 위한 건강가족자활센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과 함께 ‘레이코 후원회’도 모집하는 등 지속적인 판로 확보와 지원 확대에 희망이 커지고 있다.

문득 레이코씨에게 행복이란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범인의 눈엔 골다공증으로 약을 달고 살고 외지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사는 삶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질문은 장황했지만 레이코씨의 간단한 답변에서 행복에 대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글쎄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을 통해 조금씩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늘어가니까 그걸 보기만 해도 좋아요. 행복이죠.”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여성으로 현재 공방 회장을 맡고 있는 욜란다씨를 꼽았다. 머리도 좋고 추진력도 좋지만 다른 이들에겐 가끔 불친절해 싫어하는 사람도 꽤 있다는 욜란다씨. 그 역시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한 뒤 홀로 세 아이를 키우고 살고 있다. 손도 빠르고 정확해 판매 수익금 중 가장 많은 돈을 가져간다고 했다. 레이코씨는 “욜란다의 어머니가 골다공증이 있으 셔서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데 상금으로 보탬이 될 수 있겠다”고 했다.

“공방 사람들에게 한국에 가게 됐다고 말하면서 ‘조금 돈이 들어올거에요. 도움 줄 수 있을 거에요’라고 말해줬어요. 이들에게 해줄게 많은데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안될만큼 해줄게 많아졌거든요.”

인터뷰 내내 미소를 머금은 채 차분히 질문에 답변하는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숨을 골랐다. 11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남편 생각이 떠오를 때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배우자이자 동반자였던 남편이 떠나간 자리는 가족같은 고양이 로미오가 지키고 있다. 아들 충호씨의 함께 살자는 권유도 뿌리친 이유는 아직 리마에서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레이코씨는 “페루 여성들이 자립하고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게 목표지만 아직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한동안은 리마에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면서 또 다시 말간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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