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개인이 타율노동, 자율노동,

자활노동을 재분배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2012년 민주노총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 일대에서 노동시간 단축·일자리 창출 위한 정시퇴근운동 캠페인을 하고 있다.
2012년 민주노총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 일대에서 '노동시간 단축·일자리 창출 위한 정시퇴근운동' 캠페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요즘 정책 영역에서 ‘일·가정 양립’이 ‘핫’하다. 최근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 ‘문재인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도 이 문제를 몇 군데서 다루고 있다. 우선 국정목표3.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의 전략5.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문화국가’에 국정과제71. ‘휴식 있는 삶을 위한 일·생활의 균형 실현’이 있다. 주요 내용은 ‘장시간 근로사업장 지도·감독 강화, 육아휴직 급여 인상, 아빠 육아휴직 인센티브 강화’ 등이다. 국정과제9. ‘적재적소, 공정한 인사로 신뢰받는 공직사회 구현’의 주요 내용에도 (공직)‘육아시간·휴직수당 및 대체공휴일 확대, 초과근무 감축 등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 개선’이 있다. 또, 국정과제48 ’미래세대 투자를 통한 저출산 극복‘에는 ‘(일·가정 양립 지원 강화) ’첫 3개월 육아휴직급여 2배 인상, 아빠 육아휴직 보너스 제도 도입, 육아로 인한 근로시간 단축 지원’ 등이 있다. ‘일·생활 균형’과 ‘일·가정 양립’을 혼용하고 있어서 개념적으로 애매하고, 내용적으로도 주로 출산이나 육아와 관련지어 다루고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로 개정된 것은 2007년 12월 21일이다. 동법의 목적에 직장과 가정생활의 양립 지원을 처음 명기한 것은 그보다 6년 전인 2001년 8월 14일 동법을 전부개정했을 때였다. 당초 ‘국가는 육아휴직 근로자 생계비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다’는 정도의 소극적 내용을 담았다면 현행법에서는 육아휴직을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직장복귀 지원, 직장 어린이집 설치와 보육지원, 가족돌봄 지원 등 여러 내용을 담고 있다. 약 1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상당한 정책 발전이 이뤄진 셈이다.

개인의 삶에서 일과 가정생활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가정 양립’ 지원 정책이 전무하던 시절에 두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한 나로서는 이 문제가 얼마나 절실한지 잘 안다. 그럼에도 필자는 ‘일·가정 양립’이라는 용어와 해당 정책이 적용되어 온 양상이 불편하다.

우선 ‘일·가정 양립’은 개인의 삶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과연 내 일과 내 가정만 괜찮으면 괜찮은가? ‘일’과 ‘가정’ 사이에 끼인 ‘나’는 어떤 상태인가? 최근 ‘일·가정 양립’ 대신에 ‘일·생활(삶)의 균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데오도르 젤딘이 『인생의 발견』에서 지적하듯이 이 역시 ‘일이 삶이 아니라고 전제하는 난국’에 봉착해(345~346) 적절치 못하다. 선진국은 ‘삶의 균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여기에는 일과 가정의 균형뿐 아니라, 나 자신을 온전하게 돌보는 것과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족이기주의가 높은 우리사회에서 ‘일·가정 양립’의 강조는 자칫하면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사는데’만 급급하게 하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정부가 국정과제71을 국정목표3의 전략4 ‘노동존중·성평등을 포함한 차별 없는 공정사회’가 아니라, 전략5.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문화국가’에 포함하면서도 내용은 출산이나 육아지원과 관련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체 가구의 25%가 넘는 1인 가구를 소외시킬 수 있다. 노동에 관한 고민을 더했어야 한다.

사실 그 동안 ‘일·가정 양립’ 지원정책의 혜택을 받아 온 이들은 주로 근무환경이 좋은 공공부문이나 대기업에 다니는 기혼여성들로, 대부분은 안정적인 직업(수입원)을 가진 남편을 둔 ‘중산층 정상가족’의 여성들이다. 육아휴직의 경우 여전히 낮은 급여 수준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미혼모나 한부모 여성 가장, 영세 계층의 여성들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중소기업에서는 제도를 시행하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크고 여성들은 눈치가 보이거나 불이익이 커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형편이 비교적 좋은 대기업에 재직하는 여성들조차도 여러 가지 이유로 휴직 기간을 다 사용하지 못하거나, 사용했을 때 승진, 임금인상 등에서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육아를 여성의 일로 보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6년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 육아휴직자는 8.5%에 불과하다. 2004년 1.9%, 2014년 4.5%에 비하면 늘었지만 아직도 매우 낮은 수치이다. 남성 육아휴직자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분야는 공직, 특히 중앙행정기관들이다. 예를 들어, 올해 초 인사혁신처의 발표에 따르면 43개 정부업무평가 대상 기관의 남성 육아휴직자 비율은 2013년 13.1%에서 2014년 14.4%, 2015년 15.8%, 2016년 20.0%가 되었다. 오래 전에 필자가 지방자치단체 합동평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할 때 평가지표에 남성공무원의 육아휴직 사용률을 신규지표로 넣을 것을 수차례 제안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법이 남성들의 육아휴직을 허용하는데 사용률이 낮다면 제도를 무력화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 개선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왜 제도를 만들었나?

육아휴직이나 기타 ‘일·가정 양립’ 지원정책을 지속적으로 확대한다고 해도 이를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한 그 부작용은 부메랑처럼 여성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여성들이 육아휴직이나 관련 제도를 사용하는데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남성들을 종종 본다. 인력 부족이 심각한 조직에서 이 문제는 여성과 남성들 사이뿐 아니라,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혼인 상태나 자녀 여부에 따라 갈등의 소지가 된다. 낮은 휴직 급여의 문제도 더 많은 남성들이 제도를 사용하면 개선될 것이 분명하다. 보수적인 의사결정자들이 아직 남성을 생계부양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 육아휴직 의무/할당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종합하면, ‘일·가정 양립’을 ‘삶의 균형’으로 바꾸고 그 지원정책도 자녀를 가진 여성과 남성은 물론 모든 개인들을 위한 것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앙드레 고르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개개인이 타율노동(임금노동), 그 자체가 목적인 자율노동, 그리고 삶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자활노동을 재분배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삶의 균형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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