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세요 (Save us from saviours)

“착취적이고 배타적이며

사회적 계층 이동이나

경제적 안정에 대한

희망이 없는 곳은

성산업이 아니라 그 외부였다”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 2017 / 여문책 / 멜리사 지라 그랜트 지음 / 박이은실 옮김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 2017 / 여문책 / 멜리사 지라 그랜트 지음 / 박이은실 옮김

서울의 작은 책방에서 강연이 있던 날,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지나가던 남성으로부터 “저 여자 업소여자 같은데?”라는 소리를 들었다. 놀라서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몸을 훑어보았다. 타투, 담배, 하이힐, 진한 화장. 여성의 규범을 이탈한 내 모습은 성녀/창녀 프레임에서 손쉽게 ‘창녀’로 구분되었다. 내가 진짜 ‘업소여자’인지 아닌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나를 판단하고 모욕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창녀라는 용어는 어떤 여성이든 당대에 존중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경계를 벗어날 때 그 여성에게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쓰인 용어였다.”(로라 오거스틴)

여성에게 붙는 수많은 이름표 중 가장 위협적인 것은 ‘창녀’이다. 끊임없이 내 주위를 흐르고, 때때로 나를 관통한다. 그것은 어떻게 강력한 낙인효과를 갖게 되었을까. ‘창녀’도 ‘퀴어’처럼 전복적인 언어가 될 수는 없을까. 미국의 성노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멜리사 지라 그랜트는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랜트에 따르면 성노동자를 폭력으로 내모는 것은 사회적 낙인이다. 낙인은 ‘창녀’라는 범주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성매매 여성을 보호하겠다던 국가와 반성매매진영이 성노동자를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소외해온 역사를 밝히며, 성노동 담론에서 삭제된 당사자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나는 성노동자다’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만큼이나 구조의 피해자고 당신만큼이나 구조를 바꾸려는 행위자이며 당신처럼 일을 하는 노동자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으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인가?”(p15)

어느 여름 페미니즘 토크쇼에서 사회자가 말했다. “여러분, 장수 비결이 뭔지 아세요? 결혼하지 않는 거예요. 남성들이 성매매해서 성병 걸려오면 피해는 우리가 받아요.” 방청석 대다수가 웃는 동안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성노동 경험이 있다. 그 발언이 나를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다른 성노동자가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걱정됐다. 그 순간 희화화되었던 것은 질병의 매개체로서 여성의 몸이었다. 성노동자를 향한 동정과 멸시가 뒤섞인 혐오는 비단 남성만의 것이 아니다. “만약 여성이 타자라면 창녀는 타자의 타자인 것이다.” (136)

낙인찍힌 존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예비창녀’가 아닌, ‘창녀’로 낙인찍힐 때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사람들은 내가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하겠지만, 나에게 납득될 만한 절절한 사연은 없다. 해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단지 나는 다양한 노동 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각자의 삶의 맥락에서 성노동은 때때로 그 외의 노동보다 ‘덜 위험할 수도’ 있다. “착취적이고 배타적이며 사회적 계층 이동이나 경제적 안정에 대한 희망이 없는 곳은 성산업이 아니라 그 외부였다.”(105) 그랜트는 성노동이 좋은 노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노동자를 악마화하거나 신비화하는 인식 모두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흔히 ‘창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다르게, 성노동자는 ‘성’으로만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미디어와 구전되는 사례를 통해 자극적인 포르노로 소비되는 성노동 서사 뒤에는 섹스만 하는 성애적 인간이 아닌, 고유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사실 우리는 논쟁을 거부해야 한다. 성노동 자체 그리고 그것과 불가분한 성노동자들의 삶은 논쟁 사안이 아니다. 혹은 아니어야 한다.” (78)

“구원자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세요.” 성노동 운동에서 자주 쓰이는 표어이다. 보호보다 일할 권리를 요구하는 성노동자의 목소리를 포주에게 포섭됐다며 손쉽게 지워서는 안 된다. 성노동자를 일터에서 구원하려고 나서기 전에 들을 귀를 열어야 한다. 삭제되어온 목소리가 ‘피해자’로만 해석되지 않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그랜트와 역자 박이은실이 바라듯, 나 역시 성노동자 페미니즘이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창녀라는 낙인을 전복하는 순간을 꿈꾼다. ‘나는 창녀다’ 이후의 이야기를.

『Sex Work: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 2017 / 여문책 / 멜리사 지라 그랜트 지음 / 박이은실 옮김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