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난민의날에 만난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난민 여성 일곱빛깔 삶 담은 『우리 곁의 난민』 출간

주거와 의료, 차별과 트라우마 생생히 취재한 심층 리포트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난민 이해하고 공감하고 손잡아주길”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난민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점처럼 콕콕 박혀 있는 존재”라며 “이미 우리 곁에 들어와 있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라는 걸 책을 통해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난민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점처럼 콕콕 박혀 있는 존재”라며 “이미 우리 곁에 들어와 있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라는 걸 책을 통해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기자 출신인 문경란(58)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베일 아래 얼굴을 감춘 무슬림 난민 여성 신디(30)씨를 만난 후 일주일간 그녀와 멀리 달아나는 꿈을 꾸느라 내내 잠을 설쳤다.

보수적인 서아시아 무슬림 국가에선 ‘명예살인’이 아직 공공연히 자행되듯 무슬림은 남편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아내를 때리는 건 당연하고 심하면 죽이기도 한다. 신디씨의 무슬림 남편 역시 폭력을 휘둘렀다. 난민의 불안정한 삶에 여성이어서 겪는 성차별과 폭력이 포개지고, 여기에 무슬림 계율로 더해진 학대와 통제라는 삼중고가 중첩되는 삶이었다.

“난민 여성들은 투명인간이 아니죠”

문 이사장은 “인터뷰 중 신디씨가 잠시 히잡을 턱 아래로 살짝 내렸는데 그녀의 젊고 뛰어난 외모에 놀랐다”며 “그녀의 손을 잡고 가부장 남편으로부터 탈출시켜주고 싶었다. 이화여대 이화글로벌임파워먼트프로그램(EGEP)에 보내 키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더라”고 했다.

여성·인권 전문가인 문 이사장은 최근작 『우리 곁의 난민-한국의 난민 여성 이야기』(서울연구원)에서 라이베리아, 시리아, 파키스탄, 코트디부아르 등에서 온 난민 여성들을 심층 인터뷰해 내밀한 삶의 속살을 세세하게 전해준다. 일간지 여성전문기자로 20년간 현장을 뛰어온 이답게 글이 술술 읽힌다.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서울시 인권위원장 등을 지낸 그는 한국사회 난민들이 겪는 자녀 무국적 문제부터 취업, 주거와 의료, 차별과 트라우마까지 심층적으로 짚어낸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이 여성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이 여성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6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난민의날이지만 한국은 난민에 관한 한 인색한 나라다. 1994년 난민 신청을 받기 시작한 이래 2016년까지 2만2792명이 난민인정 신청을 했으나 실제 인정자는 672명으로 3%에 불과하다. 전 세계 난민 인정률 38%의 10분의1도 안 된다.

그가 주변사람들에게 난민에 대해 이야기하면 100명 중 99명의 반응이 비슷했다. “한국에도 난민이 있어요?” “도대체 본 적이 없는데 어디에서 살고 있나요?”

전 세계 난민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찾아오고 싶어 하는 나라이지만 난민은 우리 사회에서 투명인간이었다. 문 이사장은 “사회적 관계망 속에 들어와 있지 않아 모를 뿐이지, 난민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점처럼 콕콕 박혀 있는 존재”라며 “이미 우리 곁에 들어와 있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라는 걸 책을 통해 알리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난민 문제를 출입국관리소에서 맡다보니 출입국 단속 차원에서 바라보더라고요. 난민 협약도 가입해 있고, 난민법도 만들었지만 갈길이 멀어요. 난민 여성 10명을 만났는데 한국인과 교류하는 집은 한 두 집뿐이었어요. 이웃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소수자예요. 출입구가 따로 있는 반지하에 사는 것도 영향을 끼쳤죠.”

난민에게 한국은 친절하지 않은 나라다. ‘GDP 인종주의’란 말대로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과 달리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겐 무조건 반말을 하거나 심지어 욕설을 하기 일쑤였다. 문 이사장은 “우리가 한국전쟁 당시 수혜국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난민을 존엄한 존재로 보고 함께 손잡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에 여전한 ‘GDP 인종주의’

라이베리아 출신의 난민 마틸다(41)씨는 피부색 탓에 극심한 차별을 겪고 있다. 그는 내전을 피해 시에라리온을 거쳐 가나 난민캠프에 있던 중 2012년 한국에 왔다. 할례를 거부하고 도망쳤던 열네살 소녀가 성매매로 비행기 표를 구해 딸 도로시와 함께 한국에 오기까지 꼬박 22년이 흘렀다.

하지만 세계 11위 경제대국이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인 한국은 그에게 가혹했다. 허드렛일이나 최저임금 이하의 보상은 참을 수 있었으나 인종차별은 견딜 수 없었다. 아동복 공장에서 일할 당시 함께 일한 한국인 아줌마들은 밥 먹을 때 옆에 앉지도 못하게 하고, 국을 퍼줬더니 아예 먹지 않았다. 심지어 마틸다씨를 내보내지 않으면 자신들이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사흘 만에 공장을 나와야 했다.

저자가 난민 여성들에게 주목한 것은 이중삼중고를 겪는 마이너리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이들은 달랐다. 다수가 고학력자들로 똑똑한데다 용감했다. 피해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의연히 주어진 환경을 개척해 나갔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실제로 만난 난민 여성들은 똑똑한데다 용감했다. 피해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의연히 주어진 환경을 개척해 나갔다”고 전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실제로 만난 난민 여성들은 똑똑한데다 용감했다. 피해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의연히 주어진 환경을 개척해 나갔다”고 전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러시아에서 제법 큰 장난감 회사의 무역 담당자였던 올가(39)씨는 피서지에서 사랑에 빠진 나이지리아 남성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곤 싱글맘이 됐다. 러시아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아 떠밀리듯 고국을 등진 그녀는 난민들이 많이 사는 해방촌에 자리 잡곤 속눈썹 연장 출장시술을 하거나 엑스트라 배우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문 이사장은 “원고를 마무리할 때쯤 올가씨가 난민으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듣곤 너무 기뻤다”고 했다. 고단한 삶이지만 자포자기하지 않았던 올가씨는 이제 난민으로 제2의 삶을 열게 된 것이다.

문 이사장은 일곱명의 난민 여성 중 콩고 출신 미야씨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에코팜므 활동가인 미야씨가 멋지고 품위 있게 한국사회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 활동가들과 삶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또 미얀마 친족 출신 캐롤라인씨가 ‘난수표 해독’ 같은 대학입시를 뚫고 대학생이 된 것도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줬기 때문이다. 외딴 섬이 아니라 이웃으로 연결돼 있으면 난민도 한국사회에서 존엄하게 잘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람이 존엄을 훼손당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이웃의 환대와 연대가 필요해요. 그러려면 우선 난민의 삶을 알아야 하고, 공감을 토대로 작은 환대를 베풀 수 있어요. 불온하게 바라보지 말고, 짐으로 여기지 말고, 따뜻하게 마음을 열고 같이 살아갔으면 해요.”

문 이사장은 “한반도만 벗어나면 누구나 이방인이 된다. 게다가 굴곡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며 “난민들에게 작은 환대를 베풀고 연대하는 것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국가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의 싱크탱크인 서울연구원 기획으로 나온 ‘마이너리티 리포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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