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캐릭터는 왜 서사 위해

쓰임 받다 스크린서 사라질까

아내·딸·피해자, 악녀까지도

사랑에 목매는 여성 악당일뿐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는다. 숙희(김옥빈)는 복수를 위해 중상(신하균)에게 살해 기술을 배우다가, 그를 사랑하게 된다. 중상만 곁에 있으면 아버지 복수를 안 해도 된다는 숙희의 말에 중상은 청혼하고, 둘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밤, 중상이 죽는다. 숙희는 중상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경찰에 잡혀 비밀 조직에 스카우트된다. 이후 중상의 아이를 낳고, 딸과 함께 살다 다시 한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행복은 잠시였다. 이번에도 숙희의 눈앞에서 딸과 남편이 죽는다. 딸이자 엄마이자 아내인 그녀는 가족들의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녀, ‘악녀’.

영화 ‘악녀’를 요약하면 이렇다. 요약이 거칠지 모르겠지만, 영화 속 캐릭터를 묘사한 감독의 시선은 더욱 거칠었다. 개봉 전부터 한국판 킬빌의 탄생, 칸을 휩쓴 여성 킬러라며 많은 조명을 받은 영화여서 내심 기대를 안고 찾은 영화관. 스크린에는 익숙한 스토리와 인물, 액션의 향연이 펼쳐졌다. 남성 서사가 대부분인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이 액션 장르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한국적으로 환영할만하긴 하지만, 굳이 ‘악녀’라고 영화 제목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만큼 주인공 숙희는 익숙한 캐릭터다.

영화나 대중문화 속 여성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명예 남성, 가족이나 애인(성녀), 매혹적인 악녀(창녀). 숙희의 경우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모성 본능과 순애보를 지닌, 외모도 아름다운 여자다. 불편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이다. ‘악녀’다운 면모라면, 잠수 능력과 공격 능력 정도랄까.

독립잡지 『SECOND』는 영화 속에서 몇 가지 유형으로 전형화돼 별다른 고민 없이 만들어지고 익숙하게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를 탐구한 잡지다. 1호 ‘납작한 여자’에 뒤이어, 2호 ‘여성의 힘’이 지난 5월에 출간됐다. 2호에는 영화 ‘악녀’의 개봉을 예상했는지, ‘악녀가 아니라 악당이다’라는 꼭지가 있다. 여자 악당을 생각하라고 하면 사람들이 잘 떠올리지 못하지만, 악녀를 떠올리라고 하면 꽤 쉽게 떠올릴 수 있다고 잡지는 말한다. 남성에게 눈이 먼 질투형 악녀, 팜므파탈형 악녀는 둘 다 사랑을 이유로 악행을 저지른다.

‘다크나이트’의 조커나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과 같이 ‘악’ 자체가 동력이 되는 악당과는 분명 다른 위치다. 여성 악당은 누군가의 사랑에 목매는 존재라는 공식은 영화 ‘악녀’에서도 반복된다.

사랑이 이유가 아닌, 악 자체를 행하는 입체적인 여성 악당은 없을까? 잡지는 영화 ‘나를 찾아줘’ ‘수어사이드 수쿼드’ ‘미저리’를 소개한다. ‘악녀’를 보고 온 밤, 답답한 마음에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찾아보았다. 할리퀸 역시 조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다만 스스로 악행을 즐기고, 조커뿐 아니라 여러 동료에게 연대의식을 느끼고, 사랑에도 솔직한 좀 잡을 수 없는 면을 지닌 입체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숙희와는 대비된다.

영화를 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서사, 영상미, 음악에 주로 귀를 기울였다면, 이제는 영화 속 인물이 얼마나 입체적인지가 가장 먼저 들어온다. 영화를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영화 속 인물을 만나는 심정으로 영화관을 찾는다. 어떤 인물에게 내가 몰입하고, 그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만큼 내 인식이 확장될 수 있을지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가 손 내밀어 친구가 될 만한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별로 없었다. 여성 캐릭터의 대다수는 서사를 위해 쓰임 받다가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등장인물’이었다. 아내, 딸, 어머니, 이름 모를 피해자, 심지어 악녀까지.

『SECOND』에서 기억에 남는 인터뷰가 있다. 여배우에게 “입체적인 캐릭터란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그녀는 답한다. “사람 같은 거. 사람으로 느껴지는 게 입체적인 캐릭터이지 않을까요? 사람은 단순하지 않으니까.”

내가 스쳐왔던 많은 캐릭터를 애도하며, 잡지를 다시 정독했다. 나에게 사과하듯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신기하게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존재가 살아나는 것처럼 숨이 쉬어졌다.

필름 캐릭터 매거진 『SECOND』 2호 여성의 힘 / 2017 / 발행인 주혜린 / 발행처 누나온더비치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