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23일 가락동 스토킹 살인사건 첫 공판을 마친 후 피해자 어머니(가운데)가 부축을 받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지난해 6월 23일 가락동 스토킹 살인사건 첫 공판을 마친 후 피해자 어머니(가운데)가 부축을 받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내년이면 스토킹 법안 발의된지 20년째

어머니 눈물 닦아드리려 결혼 앞당긴다는 피해자 남동생

며칠 전 ‘가락동 스토킹 살인사건’ 피해자의 아버지로부터 청첩장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숨진 피해자의 동생인 아들이 내년쯤 하려던 결혼식을 어머니를 생각해 앞당기게 됐다고 했다. 1년이 넘게 꾸준히 취재해오면서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생기를 느꼈다. 재판 때마다 법정에 동행해 피해자 어머니를 부축하던 키 큰 예비 며느리의 얼굴도 함께 그려졌다.

기자가 청첩장을 받기 열흘 전인 5월 30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2부(홍동기 부장판사)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스토킹하다가 준비해간 흉기로 살해한 30대 남성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가 무기징역과 전자발찌 착용 20년 명령을 함께 선고했으니 2심에서 감형된 것이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재판을 마친 날 밤 12시가 넘어 전화를 걸어와 풀이 죽은 목소리로 판결에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피고인이 정신병이 거짓으로 밝혀져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해온 게 드러났으니 전자발찌 착용 기간이 늘어나거나 사형 등 처벌이 가중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가해자를 감시해야 할 전자발찌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피해자 가족에겐 분노를 넘어 공포로 다가왔다. 무기징역형이지만 30대 초반이다 보니 언제 어떻게 감형받아 출소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전자발찌마저 없는 상황을 상상하니 불안하다고 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가락동 스토킹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들은 계속해서 피고측으로 인해 연기되는 항소심 재판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애를 태워야 했다. 지난해 4월 19일 사건이 벌어졌으나 올해 5월 30일에야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한달 후인 지난해 5월 20일 발생했고 약 11개월 만에 대법원이 판결까지 나온 것과 비교해 크게 차이가 난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비극이 닥친 후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법원에 ‘딸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로 사형을 판결해달라’고 자필 탄원서를 써서 보냈다. 그 시간이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다.

판결이 지체된 가장 큰 이유는 피고 측의 지연 전술 때문이었다. 피고 측은 피해자와 피고인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다시 감식(디지털 포렌식)할 것을 요구했다. 1심 재판부의 감식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변화된 사실이 없었다. 그러자 피고 2측은 정신병 때문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정신 감정을 요구했다. 1심 당시에는 재판부가 이 요구를 기각했으나 2심 재판부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신 감정 결과 역시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국회에서는 이같은 스토킹을 막을 법안도, 스토킹이 얼마나 발생하는지 조사를 할 근거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스토킹 관련 법안은 1999년 15대 국회 때 첫 발의된 이후 19대까지 8건이 발의됐으나 그때마다 통과가 무산됐다. 이미 20대 국회에서도 여야에서 ‘지속적 괴롭힘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 등 법안 4건이 발의된 상황이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상황이다.

1년전 ‘스토킹’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피해자 부모는 이제 스토킹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딸과 이별한 남자친구에게 협박성 문자에 공포에 떨고 집 앞에서 감시를 받으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힘없는 가족이었다.

피해자의 남동생은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낳아 누나 생각에 힘들어하는 어머니에게 안겨드려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다”고 가족과 신부에게 말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워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할 예정이지만 자녀는 4명 정도 갖자고 신부와 결정했다고 한다.

늦어도 올해가 가기 전 스토킹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길 바란다. 무엇으로도 피해자 부모의 한을 풀 수 없겠지만 국가는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 손녀가 살아갈 미래 사회는 지금보다는 안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년이면 스토킹 법안이 발의된지 햇수로 20년이 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