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 ‘2017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모의법정’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누가 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2017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모의법정’을 열었다. 사진은 피고인 측 변호인이 피해자를 신문하는 모습.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누가 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2017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모의법정’을 열었다. 사진은 피고인 측 변호인이 피해자를 신문하는 모습.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왜 성폭력 피해자가 무고라는 명목으로 고소를 당해야 하나요? (무고죄 역고소는) 가해자가 범행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주는 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저 사람이 저를 무고죄로 고소한 것이야말로 무고 아닌가요.”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이미경)가 지난 2일 오후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진행한 모의법정에는 성폭력 피해자의 울음 섞인 호소가 울려 퍼졌다.

이날 ‘누가 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열린 ‘2017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모의법정’은 가상 사건에 대한 심리로 진행됐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학생 김민준(가명)씨가 시험 준비 소모임에서 만난 같은 대학 여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이었다.

이번 재판은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으로 판결해왔던 기존의 관행을 끊고, 성폭력 범죄의 올바른 판결을 유도해 성폭력 피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해소하고자 기획”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최근 가해자의 무고 역고소가 늘고 있는데, 수사재판기관이 이를 무고로 인지하고 가중 처벌할 것을 제언하기 위해 모의법정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소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신 피해자가 취한 것을 이용해 피해자의 집에서 성폭행을 저질렀다. 피해자가 거부했지만 김씨는 이를 무시하고 강간했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나를 좋아했었다. 이는 합의된 성관계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피해자를 무고로 맞고소하며 범행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재판장이 재판 중 피해자에게 “사건 이후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제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성폭력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며 “게다가 (제가) 무고가 아니라는 것까지 증명해야 해서 더 괴로웠다”고 답했다.

우리사회가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갖고 있고, 성폭력 피해자를 의심하거나 피해자 탓을 하는 인식이 여전히 공고함을 방증하는 말이다.

 

증인으로 나선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조은희 상담지원자는 “수사기관이 성폭력에 대한 이해부족과 편견을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이에 근거해 검사가 성폭력 피해자를 무고로 인지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최근에는 가해자들도 무분별하게 역고소를 남발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철저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억울한 무고 피해자’에 대한 우려가 대두됐다는 것이다. 조씨는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 진술 이외에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가해자는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고죄를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짚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성폭력 무고에 대한 공식 집계조차 없는 실정이다. 학계에선 무고 건수를 2% 정도로 보고 있다.

김씨가 최종 진술에서 “제가 철이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남자인 제가 성욕을 더 잘 참았어야 했다”고 말하자 방청석에선 실소와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이어 김씨는 “사랑 없는 성관계를 해서 그 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설령 부부나 연인, 이전에 성관계가 있었던 관계라 하더라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간음했거나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 불능의 상태인 것을 이용해 간음했다면 이는 성폭력이다.

피해자는 최종 진술에서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성폭력 피해 그 자체가 아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가 나를 자위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끔찍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고 오히려 나를 비난한다는 사실이 더 무섭고 괴로웠다”면서 “누군가는 제가 완전무결한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제가 한 행동들이 성폭력을 유발했다고, 누군가는 제가 꽃뱀이거나 미친년인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그 속에서 내가 성폭력 피해자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고,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면 오히려 무고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그는 “제가 저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을 해도 되는 이유 따위는 없다. 만약 저 사람이 이 사건으로 처벌받지 않는다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또 성폭력을 저지를 거다. 그 때는 더 교묘하게 피해자 책임으로 몰아갈 것”이라며 유죄 판결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누가 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2017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모의법정’을 열었다. 사진은 재판장을 맡은 이유정 변호사가 주문을 읽는 모습.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누가 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2017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모의법정’을 열었다. 사진은 재판장을 맡은 이유정 변호사가 주문을 읽는 모습.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이에 재판부는 김씨에게 3년형을 선고했다. 또 80시간의 성폭력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했다.

“피고인은 평소 알고 지내던 피해자가 술에 취해 있는 상태를 이용해 간음하고, 범행 이후 계속해서 범행을 부인하다가 피해자로부터 고소를 당하자 다시 피해자를 무고하는 등 죄질이 불량한 점을 고려할 때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 피고인은 준강간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피해자를 무고함으로써 범행을 은폐하고자 시도했으므로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 따라서 준강간 및 무고의 실체적 경합을 인정해 가중처벌 할 필요가 있다.”

유죄 판결에 방청석에선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성폭행에 더해 무고죄가 인정되며 가중처벌 된 것에 대한 통쾌함이었다. 그간 현실에선 강간범이 피해자를 무고로 역고소하며 범행에서 빠져나갔지만, 모의법정에선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상식적인’ 일이 일어났다. 이날 100여석의 방청석은 빈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누가 무고를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들은 방청객들의 표정은 가벼워 보였다.

이날 모의법정 재판장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이자 법무법인 원의 변호사인 이유정 변호사가 맡았으며, 피해자는 배우 정다솔(찍는페미), 피고인은 배우 류성국이 연기했다. 이밖에 배석판사, 검사, 변호인, 피해자 친구 등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판례기획단으로 모집한 자원봉사자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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