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시간이었어. 그날따라 맥주를 많이 마셨어. 전철 타기 전 화장실에 가려는데 웬 남자가 입구 근처에 서 있는 거야. 혼자 거기 서서 여자 화장실 쪽을 쳐다보고 있더라. 여자친구 기다리나 보다 하고 들어가 보니까 아무도 없었어. 곁눈질로 거울을 봤는데 그 남자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거야. 소변이고 뭐고 달려 나와서 차 타러 갔어. 사람들 틈에 있으니까 좀 진정되더라. 우리 집까지 한 시간 거린데 방광 터지는 줄 알았다.”

그날 아침, 한 친구가 내게 이런 카톡을 보냈다. 기사 쓰다가 밤을 새우고 출근하던 터라 피로했다.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또 그러면 발로 차 버려!” 친구는 킥복싱 학원에 다닌다. 곧 답장이 왔다. “ㅋㅋㅋ 그럴게~ 어쨌든 아무 일 없었는데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

점심 대용으로 카페에 들려 커피와 샌드위치를 샀다. 카페 ‘여자 화장실’에 갔더니 벽면에 낙서가 가득했다. ‘XX년들 외로우면 연락해 010-XXXX-XXXX’ ‘암캐들 내가 지켜보고 있다’ 따위의 말과 초등학생이 그렸을 법한 성기 그림이 많았다. 눈이 더럽혀진 기분이었다. 지켜보고 있다니, 변기에 몰카라도 설치했다는 뜻인가? 영 찝찝했다. 직원에게 그곳이 공용 화장실이냐고 물었다. “그건 아닌데, 남자 화장실은 건물 밖에 있어서 좀 걸어가야 해요. 급한 손님들은 그냥 여자 화장실 가시더라고요.” 왜 어떤 남자들은 화장실에서 볼일만 보고 떠나지 않고 귀한 시간을 투자해 혐오스럽고 위협적인 낙서를 남길까? 그곳이 여자 화장실이라서?

1년이 지난 후 이 기억들을 떠올린 건 그 날이 2016년 5월 17일이기 때문이다. 그날 새벽, 한 30대 남성이 강남역 인근 건물 공용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20대 여성이 들어오자 잔인하게 살해했다.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했다”고 했다. 

그 말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경종을 울렸다. 한국은 살인·강도·강간 등 주요 강력범죄 피해자 10명 중 9명이 여성인 나라다. 여성의 절반이 가족·연인 등 매우 친밀한 관계의 사람에게 폭력을 경험하는 나라다. ‘나일 수도 있었다’, ‘너는 나다’. 나도 여성이니 언제든 범죄의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여성이라서 일상적으로 겪는 성차별·비하에 관한 증언이 쏟아졌다. 나와 동료 여성 기자들에게도 이 사건은 거대한 충격이었다. 취재하고 기사를 쓰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아찔해졌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부는 허둥지둥 대책을 마련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여성대상 강력범죄’ 대책이랍시고 여·남 공용화장실 분리, 골목길 CCTV 확충, 정신질환자 관리감독 강화 등을 내놓았다. ‘사건의 본질을 놓친 근시안적 대책’이라는 비판에도 변화는 없었다.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은 “아직 대한민국에는 혐오 범죄가 없다”고 단언했다.

1년이 지났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가해자 김모(34) 씨는 징역 30년형을 선고받았다.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문재인 대통령은 “젠더폭력방지기본법을 제정해 여성이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한국엔 ‘여성에 대한 폭력’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공식 통계자료조차 없다. 사건 1주기인 지난 17일, 강남역 일대는 다시 포스트잇들로 물들었다. “1년 후, 나는 많이 변했는데 세상이 변하질 않네” “여성에겐 모든 곳이 강남역 10번 출구다” “어쩌다 살아남은 우리, 꼭 세상을 바꿀 거야.”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인 지난 17일,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추모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강남역 10번출구 벽면에 붙인 포스트잇들. ⓒ강푸름 기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인 지난 17일,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추모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강남역 10번출구 벽면에 붙인 포스트잇들. ⓒ강푸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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