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7일 새벽 1시 강남역 인근 남녀 공용 화장실. 23세의 한 여성이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화장실에서 범행 대상을 기다리며 남성 7명을 그대로 보낸 후 처음으로 들어온 생면부지 여성을 살해했다. 그리고는 “여자들이 자기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여성만을 노린 사건에 여성들은 이를 ‘가부장제에 만연한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페미사이드: Female(여성)·homicide(살해)의 결합어)’로 규정하고 거리로 나섰다. 경찰과 언론이 ‘묻지마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확연히 달랐던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후 거대한 물결이 되어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할 수 있다는 집단적 각성이었다. 사건 이후 1년이 지난 2017년 5월 현재 여성들은 안전할까. 사건 이후 1년을 되돌아보고 그동안의 한국사회 변화와 젠더폭력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1년이 지났다. 다양한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페미니스트들은 ‘그 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1년이 지났다. 다양한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페미니스트들은 ‘그 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전후로 나타난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은 지난해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자유발언대를 비롯해 여러 공간에서 활동해온 페미니스트들은 ‘그 날’을 어떻게 돌아봤을까. 이들이 바라는 새로운 한국 사회에 대한 제언도 들어봤다.

 

‘강남역10번출구’ 등 주최로 지난해 6월 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나루수산 앞 광장에서 열린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모두의 1차 공동행동’ 시위 현장. ⓒ뉴시스·여성신문
‘강남역10번출구’ 등 주최로 지난해 6월 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나루수산 앞 광장에서 열린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모두의 1차 공동행동’ 시위 현장. ⓒ뉴시스·여성신문

♦ 이지원 (강남역10번출구)

Q. 나에게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나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잃은 슬픔인 동시에, 공통의 슬픔과 분노를 겪은 많은 여성 동지들이 방문을 나서서 여성혐오와 폭력에 맞서 목소리를 내게 했던 계기이다. 사건 이후 여느 여성들처럼 나도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고 느꼈다. 이런 감각이 여성 집단 내에 광범하게 공유되었다는 점은 우리 사회의 폭력이 다분히 젠더편향성을 보인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서 근본적인 해결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은” 생존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와 여성 대상 폭력을 드러내고자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이름을 걸고 자유발언대를 열었다. 나뿐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이 용기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함으로써 여성혐오와 폭력에 적극적으로 맞섰다. 당시 현장에서 여성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고려할 때, 자신의 서사를 말한다는 것은 인터넷에 올라 어떤 모욕을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화함으로써, 우리는 폭력의 피해자를 넘어 페미니즘 운동가로 스스로의 자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다.

Q. 내가 원하는 세상은

작년 말 박근혜 정권 퇴진 집회에서 강남역10번출구를 비롯해 많은 페미니즘 단체들은 광장에서 ‘페미니스트 존(Feminist Zone)’을 운영했다. 박근혜라는 권력을 공격하기 위해 사회적 소수자를 대상을 한 온갖 멸칭과 비하를 동원하는 작태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리의 구호인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 갈 수 없다”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박근혜 이후”의 세상이야말로, 단지 박근혜 한 사람의 탄핵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최근 군 내 성소수자 사병 색출 및 구속수감 사건과 대통령 선거 중 후보들의 “동성애 반대” 발언, 강간미수 공동정범인 후보의 약진, 낙태죄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가 단 한 명에 불과한 사실 등을 지켜보며, 우리 사회는 아직 사회적 소수자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운 공간임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바란다. 권력자를 공격하기 위해 나의 소수자성이 인용되지 않는 사회를, 내가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군대 내에서 색출되고 구속되지 않는 사회를,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존재가 찬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를, 강간미수 후보는 대통령 선거에 나오기는커녕 정계를 은퇴해야 마땅한 사회를, 나의 몸과 삶이 국가체제 유지의 도구가 되지 않는 사회를. 다시 말해 인간이 평등하게 존엄하고 안전한 사회를 바란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당시 다양한 반 여성혐오
 시위를 조직하고 진행하는 데 참여해온 ‘불꽃페미액션’. ⓒ불꽃페미액션 제공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당시 다양한 반 여성혐오 시위를 조직하고 진행하는 데 참여해온 ‘불꽃페미액션’. ⓒ불꽃페미액션 제공

♦ 김가현 (불꽃페미액션)

Q. 나에게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저는 지금껏 살면서 받았던 일상적인 위협들(멋대로 팔을 붙잡거나 몸을 부딪쳐오고 소리를 지르는 등)이 모두 제 체구가 왜소해서, 힘없이 걸어서, 목소리가 작아서. 그러니까 전부 제 탓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에 따른 두려움도 겁 많은 제 성격 탓이라 여겼지요. 제 주변 친구들도 똑같이 생각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모두가 자신 탓을 하며 감내해왔고, 스스로 조심하기 위해 예민해져야만 했죠.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알게 된 거죠. 원인은 제 특징과 성격이 아닌, ‘성별’ 때문이라는 것을. 살아오며 겪었던 괴로운 사건과 상처가 사실 우리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우리가 조심하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는 진실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저와 제 주변에 절망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사실도 깨우쳐줬습니다.

Q. 내가 원하는 세상은

‘더는 두렵지 않은’ 세상을 원합니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위협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위협은 제 일상이었습니다. 뒤를 밟는 이를 피하기 위해 달려야 했고, 모르는 이에게 팔목을 붙잡혀 끌려갈 뻔한 적이 있었으며, 이름 모를 이가 퍼붓는 괜한 시비에 빠르게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주변에 하소연하면 어떤 이들은 옷차림이나 태도, 말투를 물으며 제 탓을 해 왔지요. 비단 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제 친구들이 그랬고, 많은 여성분들이 이러한 상황을 겪어 왔었으니까요. 이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찾는 세상이 틀렸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도 여성들에게 책임의 굴레를 씌웁니다. 이것이 결국 여성혐오의 근간이 되는 사고입니다.

 

지난 4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페미니스트 직접행동-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에 참여한 ‘찍는 페미’. ⓒ‘찍는 페미’ 제공
지난 4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페미니스트 직접행동-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에 참여한 ‘찍는 페미’. ⓒ‘찍는 페미’ 제공

♦ 일월담 (작가·찍는페미)

Q. 나에게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여기 세 사람이 있습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 30대 여성, 정장을 차려입은 20대 남성, 미니스커트를 입고 피어싱을 한 10대 여성.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에겐 어떤 옷차림으로 언제 외출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성이 강력 범죄 피해자가 됐을 때 옷차림과 밤늦게 외출한 이유를 따져 묻습니다. 

강남역 번화가의 가게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피해자에게도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왜 밤늦게 그곳에 있었냐고 말입니다. 그건 힐난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심각한 여성혐오와 치안 불안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려는 비열한 수작이었습니다. 

Q. 내가 원하는 세상은

모두가 사람인 세상을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이화여대 성소수자 모임 ‘갤럭시’ 소속 학생들 ⓒ이세아 기자
이화여대 성소수자 모임 ‘갤럭시’ 소속 학생들 ⓒ이세아 기자

♦ 김현선·박소선(가명) 이화여대 성소수자 모임 ‘갤럭시’

Q. 나에게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김 :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말할 수 있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페미니즘에 관심없어 보이던 여성들도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더는 이런 이슈에 대해 말하고 지지하고 행동하는 걸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박 : 여성혐오의 실체를 알게 해 준, 여성혐오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지 알려준 사건이었습니다. 

 

Q. 내가 원하는 세상은

김 : 혐오인지 아닌지 누군가가 정해 주지 않는 세상을 원합니다. 내 순서를 왜 남이 정해 주나요? 

박 : 내 존재가 위협받지 않는 세상을 원합니다. 특히 ‘퀴어 인권, 동성혼은 시기상조’ 같은 이런 말을 더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2016년 5월 19일 오전, 시민들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을 찾아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이지은 씨도 이날 추모 포스트잇을 붙였다. ⓒ이세아 기자
2016년 5월 19일 오전, 시민들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을 찾아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이지은 씨도 이날 추모 포스트잇을 붙였다. ⓒ이세아 기자

♦ 이지은 (동시통역사)

Q. 나에게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중대한 ‘발견’이자 하나의 ‘이정표’입다. 여성이 ‘여성이라서’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접한 날, 각계각층의 여성들은 분노했고 슬퍼했으며 하나의 목소리를 냈죠.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주변에 페미니즘의 아이디어를 퍼뜨렸습니다. 저는 원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 강남역 이후 벌어진 여러 시위와 온라인 해시태그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한국 사회에선 금기에 가까웠던 페미니즘을 대중이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페미니즘적 요구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단시간에 형성되는 모습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 흐름을 ‘트페미’라며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우리 모두가 똑똑히 지켜봤듯 여성들의 분노는 그대로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페미니즘의 질문들을 만나 고민하고, 주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행동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Q. 내가 원하는 세상은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흔하고도 터무니없는 오해는 그것이 여성 우위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 즉 ‘역차별’을 조장하려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복구하자는 외침이, 운동장을 반대편으로 기울게 하자는 목소리로 해석되지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도 그런 오해에 빠져서 페미니즘을 배척하고요. 지난 1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더 많은 오해가 벗겨지길, 더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이 왜 나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지 알고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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