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피난민의 2남3녀 중 장남

“공부만 한 ‘범생’ 아냐… 별명 ‘문제아’”

 

비SKY대 운동권… 유신 항거 시위 주동

부친 49재 후 고시 공부, 사법시험 합격

 

판사 임용 좌절된 후 인권변호사의 길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정치일선 ‘호출’

‘촛불 민심’ 얻어 재수 끝에 청와대 입성 

 

문재인 시대가 열렸다. ‘촛불 혁명’이 낳은 ‘촛불 대통령’이 탄생했다. 가난한 피난민의 아들에서 ‘촛불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에는 격동의 현대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그 정점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 노무현과의 운명적 만남이 그의 운명을 만들었고, 문재인은 재수 끝에 노무현의 뒤를 이어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피난민 아들 “가난은 내게 준 선물”

“(가난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자서전 『운명』 중에서)

1953년 1월 24일 문 대통령은 경남 거제군 명진리의 가난한 피난민 집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그의 가족은 ‘서민 달동네’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가난은 천형과 같았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시절이었다. 문 대통령은 지금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가난한 형편에 자전거 살 돈도, 배울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의 명문 경남중을 거쳐 경남고에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지만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웠다. 고교 시절 처음 이름 때문에 붙은 ‘문제아’라는 별명이 실제상황이 됐다.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아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학과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유신독재 앞에서 책만 파고들 수는 없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하자 사법살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됐다. 이듬해 석방되자마자 강제징집 당한다.

문 대통령은 19대 대선 TV 토론 당시 특전사령부 공수부대 당시의 사진을 공개했다가 ‘전두환 표창장’ 논란을 겪었다.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 군인 문재인은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강제징집된 군에서 뜻밖에 두각을 보인 것이 야당 대선 주자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종북’, ‘안보 불안’ 이미지를 떼게 해준 자산이 됐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들, 특전사 출신 문재인 앞에서 안보 이야기 하지 마시라”는 그의 호통에 유권자들은 그를 ‘안보를 가장 잘할 것 같은 후보’로 꼽았다.

유신타도 시위와 강제징집, 특전사

1978년 제대하지만 복학의 길이 막혔다. 그 와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1980년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당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학내시위 와중에 사시 2차 시험도 치렀다. 그해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경희대 운동권 핵심이던 그는 구속되고 만다. 군사재판에는 회부되지 않은 채 20 여일이 넘도록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드라마 같은 반전 스토리다.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이 무렵 7년간 연애해온 김정숙과 결혼했다. 대학 2년 후배로 법대 축제 때 처음 만나 구속과 강제징집, 고시 공부로 이어지는 긴 연애 끝에 결혼이란 결실을 맺었다.

판사를 지망하지만 시위 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했다. 그 또한 운명일까. 그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국내 최대 대형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모든 제안을 뿌리쳤다. 노무현 변호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예비된 부산행이 그의 길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처음에 동업자로 만났지만 일을 넘어 서로에게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맡다보니 자연스레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의 법률사무소는 부산은 물론이며 인근 울산 창원 거제 등을 망라하는 지역 노동인권사건을 총괄하는 센터처럼 돼 버렸다.

그러다보니 재야운동에까지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문재인은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을 맡았다.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는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한 6월 항쟁이 살아온 동안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참여정부가 시작되면서 문재인은 민정수석 두 차례와 시민사회 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왕수석’이 그의 별명이었다. 늘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청와대 생활 1년동안 과로로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였다.

건강을 상한 문재인은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훌쩍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곧장 귀국해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두 번의 민정수석을 거치는 동안 가장 큰 아쉬움으로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불발을 꼽았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 그는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이 돼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이와 함께 한미 FTA라는 국가중대 협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노 대통령 서거… 재수 끝 청와대 입성

2009년 5월 23일 아무도 예측 못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운명처럼 그를 정치판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출마했다. 노무현이 걸었던 길처럼 좁은 길을 선택했고, 기적처럼 당선됐다. 총선 승리 후 그는 18대 대통령선거 후보가 되지만 정권교체에는 끝내 실패했다(48.02%).

대선 패배 후 침묵했던 그는 2013년 『1219 끝이 시작이다』란 책을 펴내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NLL(서해북방한계선) 포기 논란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등이 그를 다시 정치 일선에 불러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족인 유민 아빠와 동조 단식도 했다. 문재인에게 이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숙명이었다.

2014년 12월 29일 문재인은 당대표 출마 선언을 하면서 “세 번의 죽을 고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예견했다. 당대표 취임 이후 10개월은 가시밭길이었다. ‘공천 혁신안’에 반대한 안철수 전 대표 등이 2016년 4·13 총선을 앞두고 대거 탈당하면서 그의 리더십은 결정적 위기를 맞았다. 그는 2012년 대선 때 경쟁자인 박근혜 후보 쪽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 전 의원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했다. 총선 결과는 승리로 마무리됐다. 부산·경남에서 11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고, 수도권에서 선전하면서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확실히 부상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대통령이 탄핵되는 초유의 사태가 불거졌다. 공정한 사회를 염원하는 국민은 광장으로 모였다. 그렇게 1700만개의 촛불이 켜졌다. ‘촛불 혁명’이 성공하면서 ‘문재인 대세론’은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2017년 5월 9일 급박하게 치러진 조기대선에서 국민은 그를 새로운 대한민국호를 이끌 리더로 낙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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