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수구의 지지 등에 업은

후보에게 사람들은 왜 관대할까

 

보수 우파는 경제 잘 살려내고

능력 있으니 파렴치해도 된다고?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유권자의 절반이 여성임을 모르는 사람 없는 세상에, 대놓고 “남자 할 일 따로 있고 여자 할 일 따로 있다”면서 자신은 결코 설거지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자가 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맛 간 남자사람’이다. 여염의 남자도 그런 사고를 가졌으면 욕을 자초할 일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자가 태연하게 그런 말을 지껄인다. 입에 걸레를 문 것처럼 막말에 한심한 사고를 그대로 드러낸 자다. ‘합법적 조폭’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는 검찰 출신이라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미 정치인으로 전환한 지 오래니 그 변명조차 구차하다. 나중에야 그런 뜻이 아니며 자신도 집에서 설거지 가끔 한다고 꼬리를 내렸다.

그런데 점입가경인 게 심지어 대학생 때 친구의 성폭행을 돕기 위해 돼지발정제를 구입해서 건넸지만 ‘끝내’ 무산됐다고 태연하게 토로했다. 10년도 넘는 과거에 쓴 책이며 자신이 성폭행을 시도하지도 않았으며 다시는 그런 짓하지 않겠다고 반성했다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이쯤이면 엽기적인 인물이다. 만약 그가 야당 출신이었다면 과연 그런 치명적 허물이 용납될 수 있을까?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끝내 스스로 후보 사퇴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수와 수구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그에게는 사람들이 왜 그리 관대할까?

보수 우파라면 그 정도쯤(?)은 눈감아줄 수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보수는 도덕적으로는 조금 파렴치할 수도 있지만 유능하고, 특히 경제를 잘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설령 유능하고 경제를 살려낸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하자가 있거나 특히 약자에 대한 공감과 동정심은커녕 왜곡과 억압의 사고 그 자체로 이미 실격이다. 그런데 정작 경제와 안보를 책임질 능력도, 비전도 없다. 그저 막말과 선동과 편견으로 일관된 사고의 소유자다. 그런 자가 일국의 대통령 후보라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도 21세기에.

보수는 결코 경제와 안보에 최적자가 아니다. 제임스 길리건이라는 미국의 정신의학자는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더 해로운가』라는 책에서 보수가 집권하면 오히려 규제를 풀게 되는데 거의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는 규정이 포함된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렇게 되면 해고가 만연하게 되고 새로운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 자살을 택하는 비율이 높아진다는 점을, 미국 자살률과 공화당-민주당의 집권 시기의 주기가 놀랍게도 일치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경제가 살아나기는커녕 고용 불안정이 가속되고 따라서 시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된다. 물론 잠깐 경제가 살아나는 듯할 때도 있지만 그 이익은 대부분 자본가와 주주들에게 돌아갈 뿐이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길리건의 지적이 무엇인지 새삼 새겨들어야 한다. 그런데 가축에게 사용되는 발정제를 친구가 의도하는 성폭력을 위해 구입해줬다는 ‘자신의 고백’에 반성하고 그에 책임지고 사퇴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를 보수 우파 정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거나 그 정당이 조금 부패할 수는 있지만 능력은 있다고 착각하고 유독 그들에게만 관대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받아주고 심지어 열정적으로 표를 몰아주기도 한다.

결국 유권자의 수준이 그 나라 정치의 수준을 결정한다. 아무리 보수 우파를 지지한다고 해도-보수와 수구의 구별은 차치하고라도-성폭력 모의 가담자에게 표를 던지려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된다. 그가 탐하는 자리는 모든 판단의 가늠자이며 미래 가치를 결정하는 최상의 자리다.

진보건 수구건 과거로 퇴행하는 자들은 미래로 가는 기차에 태우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 손으로 쫓아내야 한다. 후보자보다 똑똑한 유권자임을 보여야 한다. 그 자리는 파렴치범이 감히 탐할 자리가 아니다. 시민들이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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