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 가는 서울의 합정동과

망원동, 제주도의 그 많던 중국인들

그들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드 보복’이 가져다 준 인간안보

 

팍스 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만나는 한반도에서 선택 많지 않다

찬반이 아니라 국민의 다양한 경험이

국가안보와 충돌한다는 현실 드러내야

 

주한미군 사드 한국 배치와 관련, 중국 당국의 한국 단체 관광 금지 조치로 중국인 관광객이 급격하게 줄었다. 사진 왼쪽은 지난해 10월 중국 국경절 연휴기간에 열린 ‘코리아 세일 페스타’ 기간에 서울 명동 거리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들, 오른쪽은 지난달 중순 명동 거리의 모습이다. ⓒ뉴시스·여성신문
주한미군 사드 한국 배치와 관련, 중국 당국의 한국 단체 관광 금지 조치로 중국인 관광객이 급격하게 줄었다. 사진 왼쪽은 지난해 10월 중국 국경절 연휴기간에 열린 ‘코리아 세일 페스타’ 기간에 서울 명동 거리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들, 오른쪽은 지난달 중순 명동 거리의 모습이다. ⓒ뉴시스·여성신문

국가안보=국민안보?

그간 우리 사회에서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는 모든 사유를 정지시키는 언어의 사각 지대였다. 한쪽에서 ‘북풍’이 불거나 색깔론을 들이대면, 다른 쪽에서는 “더 이상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지 말라”, “정권안보로 이용하지 말라”고 대응해왔다. 오랜 세월 동안 이런 말들이 오가다 보니, 이제는 양측의 주장이 모두 ‘전가의 보도’, 즉 상투적 표현처럼 느껴진다.

이 글은 최근 사드 논란에 대해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시도다. 아래 이야기들은 언뜻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소한 에피소드들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저런 작은 목소리들이, 너무 모호해서 혹은 전쟁이라는 압도적인 공포 때문에 대항하기 어려웠던 국가안보 담론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를 짓눌러왔던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상대화하는 방법은 ‘작은’ 예외들이 물줄기를 이루어 “물 샐 틈 없는 안보 태세”에 틈새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국가안보 담론에 대한 저항은 국가와 안보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한미동맹은 남한의 국가안보 정책의 근간이다.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일단 주한미군 주둔기지 지역 주민의 희생과 고통이다. 질문은 간단하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 남한은 전 세계에서 단위 면적 당 가장 많은 미군 기지가 ‘박혀’ 있는 지역이다. 사드 문제는 중요한 대선 이슈다. 지난해 7월 13일 국방부는 부지가 결정되기도 전에 장비부터 들여와 경북 성주시와 김천시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사드 부지로 예정된 성주골프장을 소유한 롯데상사 앞에서 시민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즉각 대응(‘경제 보복’)에 나섰다. 갑자기 중국 관광객이 사라졌다. 지난 몇 년간 서울과 제주에는 중국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빨간 여권의 중국인 관광객은 한국 풍경의 일부였다. 내가 사는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10평도 안 되는 유명(?) 중고 서적이 있다. 워낙 관광 명소가 없다보니, 그곳까지 대형 관광버스 일곱 여덟 대가 줄지어 서있는 바람에, 인근 지하철 입구에서 승객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 적도 있다. 여기가 어느 나라인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내가 주로 일하는 곳은 서울의 합정동과 망원동 그리고 제주도다. 전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쇼핑하는 화장품, 인삼, 담배를 파는 대형 매장이 밀집해 있다. 제주는 이미 중국인들이 부동산 구매부터 서귀포 공항 건설 건까지, 제주도의 미래를 좌우할 정도다. 몇 년 전 우근민 제주도 도지사는 ‘제주 관광의 글로벌화’를 업적으로 자랑했다가 어느 기자가 “90% 이상이 중국인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바람에 망신당했다. 우리의 상식은 ‘외국 관광객=수익’이지만, 세계적인 관광 도시 교토의 경우는 중국 관광객(혹은 간혹 한국인까지) ‘사절’ 분위기다. 대규모 관광객이 도시 미관과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 곳에서나 도시락 먹기, 방뇨, 소음 등으로 관광지의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사드 배치와 그로 인한 중국의 대응은 내게 뜻밖의 ‘인간 안보’를 보장해주었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의 그 많던 중국인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인구 밀도가 낮아질 때의 그 쾌적함! 나는 소음에 약하기 때문에 외출 시 언제나 귀마개를 착용해야 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면 탈진 증상이 있는 건강 약자다. 동물 실험에서도 증명된 바 있듯이 좁은 공간에 개체수가 많은 상황은 스트레스와 암의 주범이다. 이것이야말로 국가안보를 넘어 생명권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현상이 작은 문제인가?

국가안보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실체’가 아니라 ‘규범’에서 출발한 사고방식이다. 인간안보(human security) 개념은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등장했다. 국가안보를 둘러싼 국민의 이해관계는 동일하지 않다. 지역과 성별, 계급에 따라 안전보장의 영향력은 크게 다르다. 서울 강남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평택이나 매향리 주민들은 환경오염과 비행기에서 쏟아지는 탄약 폭발음에 시달린다. 안보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경우는 없다. 이처럼 국민 개개인 모두의 안전이 소중하다는 의미에서 ‘인간안보’가 등장했지만 나는 ‘안보’ 개념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므로 ‘인간 안전(safety)’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사드 덕분에’ 잠시 중국인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현상의 대척점에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관광산업, 차량 운수업, 대형 마트, 식당업자 등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거대한 손실이 있다. 때문에 정부는 물론 ‘진보 신문’조차 중국의 조치가 “대국답지 않게 치졸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국가안보에 대한 국민들 간의 이해관계의 차이다.

의외의 반전주의자들

군사주의와 투쟁하는 서구 여성주의자들은 현재 글로벌 사회를 ‘안보-시장 국가(security-market state)’라고 분석한다. 군사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군수산업)이라는 얘기다. 이와 달리 남한에서는 국방 문제가 자본주의 이슈라기보다는 주로 한미동맹, 북미관계, 북풍 등 이데올로기나 외교 문제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사실 우리 안보 문제의 ‘뒤태’도 미국산 (고철)무기 수입을 비롯한 경제 문제다.

물론, 우리의 상황은 서구보다 훨씬 복잡하다. 미국의 반(反)군사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안보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에 모두 반대해도 ‘되지만’ 우리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핵은 저렴하지만 살상력이 큰 무기로, 빈곤한 약소국에게는 매력적인 국방 자원이다. 우리사회에서 평화, 통일운동 세력이라는 불리는 ‘진보’ 진영 중 일부는 주변 4대 강국(중‧미‧일‧러)으로부터 자주국방을 위해, 핵 개발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처럼 한국사회는 평화운동, 군축운동, 통일운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남한의 대기업들은 미국처럼 군수산업 위주가 아니다. 무기보다 자동차나 전자 제품을 주로 생산한다. 한국사회의 ‘강력한’ 반전, 반핵 세력 중 하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와 무기 마니아들이다. 1948년 ‘건국’ 이후 최초로 군축을 주장한 집단은 전경련이다(1991년). 26년 전, 대단히 ‘빠른’ 문제의식(?)이 아닐 수 없다. 남한의 자본가들이 군축을 제안한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잠시 세계적인 ‘해빙’ 무드가 조성되자 한반도에도 봄이 왔다고 판단한 대기업들은 군사비를 과다 지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남한의 핵무기 개발이나 독자적인 무장을 원치 않는다.

만일 그런 상태가 된다면, “현대자동차 금수(禁輸,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릴 것”이다. 전경련은 우리가 계속 미국의 군사 ‘보호 아래’ 있으면서, 남한 기업의 공산품 수출 보장을 원했다. 수출주도형 경제는 해외 시장 의존을 의미하고, 우리에게 해외 시장은 미국이 전부인 시절이었다. 미국에게 거슬리면 안 되는 것이다. 남한의 자본가들이 ‘평화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지금 사드 문제는 한국이 중국과 미국과 맺는 관계가 균형을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친미적이기 때문에), 현재 사드 문제로 인한 대기업들의 중국 수출 급감은 지난 시절 전경련의 경우와 다르다. 다시 말해, 대기업들에게 대미 수출과 대중 수출 중단은 같은 급의 위험이 아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미국이 중요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하나의 반전 그룹. 군사주의 ‘문화’는 역설적으로 반전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주로 남성들인 무기 마니아들 중 일부는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인 무기의 경량화와 형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쟁에 반대한다. 자신들이 아끼는 ‘예술품’인 무기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유명한 진보 논객인 모씨는 경비행기 마니아인데, “나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화물기나 승객기가 싫다. 이 비행기들은 뚱뚱하고 느리고 못 생겼기 때문이다. 반면, 일인용 전투기는 날씬하고 빠르다(아름답다)”는 ‘군사주의 미학’을 유력 주간지에 기고한 적이 있다. 아무도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남자 어린이들의 생애 최초의 장남감은 대개 무기류들이다. 총, 칼, 로봇, 탱크…. 이러한 현상이 무기 페티시즘으로 가는가, 전쟁광의 전초인가는 연구해 볼 만한 과제이다.

“전쟁=피난길”인 시대는 지났다

맨주먹으로 싸웠던 백병전(hand to hand) 시대에, 무기를 뜻하는 ‘arm’과 육군(보병)을 뜻하는 ‘army’라는 말이 유래했다. 얼굴을 맞대고 싸웠던 시대에는 팔 길이가 긴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곧 무기였던 시대에 화살은 손과 팔의 확장이었고, 소총은 눈과 이빨의 확장이었다. 총알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발사된다. 총을 쏘려면 조준기가 필요하다. 즉 눈이 좋아야 했다.

그러나 현대전의 조준기는 컴퓨터가 대신한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리모트 컨트롤(원격 조종, 리모컨)은 전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리모컨으로 우리는 TV 화면을 조정하기 위해 TV 곁에 다가가지 않아도 된다. 멀리서 손가락만 터치하면 화면이 바뀐다. 이처럼 과학 기술의 발달은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의 몸과 목표물의 유효거리(사정거리)가 점점 멀어졌음을 뜻한다.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는 말 그대로, (미국의 시각에서) 중국이나 북한 등이 자국을 공격해 오면 미사일이 땅에 닿기 전에, 고도의 상공에서 분쇄해버리는 ‘방어’ 미사일을 말한다. 이 무기는 지상 이동과 공중 수송이 용이하다. 사드 시스템의 레이더는 500~1800km의 탐색 능력이 있다(서울에서 평양까지 거리는 ‘국방일보’ 기준으로 약 200km). 또한, 상대방의 미사일을 직접 요격하는 1차 요격 후에도 다시 2차 요격할 수 있는 2회의 교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2008년부터 미 육군에 실전 배치됐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사드만 ‘있어도’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한반도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자국의 국방력이 이미 사드를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이 한반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쟁 이미지는 이삿짐을 싸서 돌아다니는 6.25 혹은 게임이나 영화에서 본 미국이나 다국적 민간 전쟁 주식회사(private military company)가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행하는 첨단 무기전이다. 사실 전쟁 시나리오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대개 전문가들은 좁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전멸, 공멸을 예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이나 지진이 난다는 예보가 있으면 라면을 사재기하는 이들이 있는데 시대착오적이다. 건물이 박살나는 판에 어디서 라면을 끓이겠는가.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핵심인 X-밴드 레이더(AN/TPY-2)의 국내 도입이 임박한 가운데 지난달 16일 경기 평택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 정문에서 평택시민행동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핵심인 X-밴드 레이더(AN/TPY-2)의 국내 도입이 임박한 가운데 지난달 16일 경기 평택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 정문에서 평택시민행동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근본적인 문제, 전쟁에 대한 성별 이해(利害)

사드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전쟁에 대한 시각과 이미지, 상상력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대로, 현대 전쟁은 6.25처럼 ‘난리통’ 같은 형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여성주의 국제정치학의 시각이다.

인간 세계를 사적/공적 그리고 국내적/국제적 경계로 나누면, 사적인 세계나 국내 영역은 “단란하지만 좁은” 세계로서, 이러한 영역으로부터 멀리 나갈수록 인간(남성)의 욕망은 실현된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상징적 차원에서 일상적인 것과 가장 거리가 먼 ‘국제’, ‘정치’는 엘리트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사생활, 가정과 가족생활, 그리고 시민사회조차 국제정치로부터 배제되어 왔다. 일상적 언어는 국경을 넘어선 세계의 성별성을 보여준다. ‘처녀지 정복’처럼 명시적으로 성적인 용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남자(a man of the world)” “군인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자(join the army, see the world)”처럼, 더 멀리 갈수록 더 남성적이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전쟁과 평화가 성별 중립적인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 분야에 젠더를 가시화하는데 집중해왔다. 국가안보에 대한 여성주의 비판은,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이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주요한 사회 문화적 구조라는 것을 논증해왔다. 즉,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 필연적인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의 기원, 구성 과정, 조직 원리는 힘(power), 자율성, 자주(self-reliance), 용기, 합리성, 권력 극대화, 무력 사용의 효율성에 대한 믿음과 같은 남성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이러한 남성다움은 여성다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문화적 상징, 전시 성폭력 피해자, 군인, 군수 산업 노동자, 군대 주변 성 산업 종사자, 군인과 외교관의 어머니와 아내 등 해당 사회가 허용하는 거의 모든 성별화된 방식으로 안보 정책에 참여(동원)해왔으며, 안보사회의 피해자이자 생산자이자 소비자였다. 국가안보에 대한 여성주의 연구는 가부장제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보편적인 인간 문제로 간주되었던 전쟁(방어)의 당위성과 불가피성이, 실은 ‘남성 정체성의 정치’의 극대화된 표출이며 성별화된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밝혀왔다.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비롯한 일상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an)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전쟁과 평화의 구분이 남성들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현실이다. 수많은 가정폭력 피해여성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남성 폭력으로 인한 ‘과실치사’로 사망한다. 강남역 사건 같은 여성살해(femi/cide)는 2016년 5월 17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모든 이들에게 일상이 전쟁터다. 남성들도 이 각자도생 시대의 삶 자체가 “전쟁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고 외쳐대지 않는가.

이처럼 평화(‘일상’)의 개념을 둘러싼 가장 이해(理解)가 다른 대립 집단은 남성과 여성이다. ‘군 위안부’ 역사처럼, 여성은 언제나 전쟁 혹은 “나라 없는 설움”의 가장 큰 희생자일까? 인류 역사상 여성이 노동시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시기는 여성운동이 활발했던 때가 아니라 전쟁 때였다. 전쟁으로 동원된 남성 노동력을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어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 간)전쟁이 끝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자, 집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1990년대 초 소말리아 내전에서 여성들이 전쟁에 자원한 이유는,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집보다 밥을 주는 군대가 낫기 때문이었다. 유랑 중인 쿠르드족의 여성운동가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독립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논란거리였지만 남성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사소한’ 이슈, 한국의 평화운동 집회에서 합창되는 “fucking USA”. 이는 평화의 구호인가, 아니면 ‘여성’(여성화된 미국)에 대한 폭력을 선동하는 노래인가? 이상의 사례들은 여성에게는 전쟁 상태가 낫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가의 존재나 전쟁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외는 폭력이 만연한 양육 강식의 무정부 상태이고, 국내는 그러한 국제 질서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안정과 질서의 공간이라는 안보 논리의 근본 가정은(전제는)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인신매매나 아내에 대한 폭력에서 보듯이, 여성에게는 국내나 가정이 더 위험한 공간일 수 있다.

대개 여성들은 국가 내부에서 더 일상적으로 폭력 상황에 노출된다. 국내정치와 국제관계가 분할되었다는 이데올로기 즉 국가라는 경계 자체가, 국민국가 내부의 타자인 ‘비국민’에게는 의미 있는 정치적 전선이 아닌 것이다. 동성애자에게는 외국군보다 이성애 제도가, 장애인에게는 분단 상황보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체제가 더 위협적이다. 국민국가 내부의 타자들은 공/사 영역에 걸쳐 문화와 정상성이라는 이름의 일상적, 구조적 폭력에 시달린다. 이들에게 정치는 선거 때나 혁명, 전시에 국한되는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다. 24시간 365일, 일상 자체가 이들에겐 정치적이며 갈등적인 시공간이다.

사실, 군사주의(militarism)는 군사적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전시보다 그렇지 않은 평화 시에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군사주의는 실제 전쟁에 임하는 군사적 목적(military way)과 이와 상관없이 전쟁을 신봉하는 문화를 구분하기 위한 용어이다. ‘국민’의 의미를 전유(專有)한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에게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지만, 그 외 대다수 비국민에게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이다. 어쩌면, 전쟁의 진정한 목적은 ‘진짜’ 정치를 탈정치화, 사소화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드 문제에 대한 남한 사회의 선택은 사회적 논의와 촛불과 같은 국민적 저항으로 미중 관계를 압박하는 일이다. 저항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찬반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한 국민의 다양한 경험이 국가안보와 충돌한다는 현실을 가시화해야 한다. 전쟁의 주도권이 우리 정부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나 중국이 한반도의 안전을 얼마나 걱정하겠는가. 사람들은 ‘찬반’만을 묻는다.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온 이들에게도 빠지지 않는 질문이 “사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다. 대답도 똑 같다. “국익에 좋다” 아니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잘 협상해야 한다”. 팍스 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만나는 한반도에서 우리의 선택은 많지 않다. 나는 다만, 그들이 충돌하지 않고 ‘접촉하기만’ 바랄 뿐이다.

 

필자 정희진씨는 서강대 강사,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저서에 『낯선 시선-메타 젠더로 본 세상』, 『정희진처럼 읽기』, 『페미니즘의 도전』, 『아주 친밀한 폭력』 등이 있고, 최근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를 편저했다. 45권의 공저서와 300여권의 책에 서평과 해제를 쓴 글쓰기 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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