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 동의 얻어야 낙태라니….

양성평등에 반하는 구시대 법일뿐

구체적 지침 없어 주먹구구식 판단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 두 번 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강남역10번출구, 불꽃페미액션 등 14개 여성단체가 지난해 10월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시위를 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 강남역10번출구, 불꽃페미액션 등 14개 여성단체가 지난해 10월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시위를 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고교 2년생 딸을 키우는 박민정(40·가명)씨는 지난 1월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을 겪어야 했다. 열일곱 살 밖에 안 된 딸이 가출했다가 페이스북을 통해 만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얼이 빠진 아이는 엄마를 보고도 아무 말도 못했다. 심한 충격 탓에 극심한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킨 다음에야 부모는 검사 끝에 임신을 확인했다.

아이를 진료한 장형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 부소장은 “아이가 해리 증상(의식, 기억 등의 갑작스러운 이상 상태) 탓에 자신이 겪은 일을 또렷하게 말하지 못하니까 경찰이 의견서도 못 준다더라”며 “임신중절수술은 24주 내에 해야 합법인데 아이는 매일 오열하고 경찰은 의견서를 주지 않아 애가 탔다”고 말했다. 장 부소장은 “결국 수술은 했지만 과정이 너무 복잡했다. 여러 명의 의사가 의견을 모아 ‘성폭력이 맞고 수술해야 한다’는 내용에 사인해서 증빙 서류를 만들었다. 모자보건법상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보니 산부인과 의사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혀를 찼다.

인공임신중절을 엄격히 제한한 모자보건법을 차기 정부가 반드시 개정하거나 형법상 낙태죄를 전면 폐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특히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바라기센터를 비롯해 법조계, 여성계 전문가들은 “모자보건법은 양성평등에도 반하는 원시적인 법”이라고 일제히 지적하고 나섰다.

우리나라 낙태 건수는 연간 17만건 가량 되며, 대부분 모자보건법상 낙태 허용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는 “배우자 동의를 기본적으로 요구하는데 이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할 뿐 아니라 아내가 남편 몰래 낙태하면 가정폭력이 일어날 우려도 있다. 고지조차 위헌으로 판정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합리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시대에도 뒤처져 있다”며 “법명부터 양성평등에 반한다. 여성을 출산 도구로 본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낙태제한법, 낙태규제법 등 가치중립적 표현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어 “아동·청소년 성매매나 위계·위력에 의한 간음도 성폭력특별법상 성폭력으로 처벌받는데 낙태를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차일피일 미루면 모성 건강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나 주체에 대한 규정이 없어 일선 현장에선 주먹구구식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미성년자에 대해 성인 여성과 같은 잣대를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미성년자가 낙태를 원할 경우 허용하는 방향으로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임신중절 수술에 대한 처벌 강화가 인공임신중절을 줄이는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에서 낙태죄를 가장 엄격하게 처벌하는 나라가 한국인데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인공임신 중절률을 보이고 있다는 게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 지적이다.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다면 임신 초기 낙태만이라도 선진국처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독일은 임신 12주 이내, 프랑스는 임신 12주 이내, 스페인은 임신 14주 이내에는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미국은 임신 22주 이전에는 임부의 낙태권과 프라이버시권을 우선해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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