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장애인·성소수자 83.3% 방송 통해 혐오표현 경험

예능 여성 출연자도 22%뿐… 방송 성비 불균형도 여전

제작진 인권감수성 개선 위한 예방 조치나 교육은 전무

호주·영국·캐나다는 ‘성평등 제작 가이드라인’ 활용

 

지난 3월 15일 KBS2TV 오전 뉴스의 코너인 ‘연예수첩’ 영상 캡쳐. 가수 겸 배우 박유천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여성을 가리켜 ‘무고녀’라고 지칭했다. ⓒKBS2TV
지난 3월 15일 KBS2TV 오전 뉴스의 코너인 ‘연예수첩’ 영상 캡쳐. 가수 겸 배우 박유천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여성을 가리켜 ‘무고녀’라고 지칭했다. ⓒKBS2TV

“가수 겸 배우 박유천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던 또 다른 여성이죠. 송모씨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지난 3월 15일 KBS2TV 오전 뉴스의 코너인 ‘연예수첩’은 남성 연예인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소식을 다루며 ‘박유천 고소녀 무고 기소’라는 제목을 달았다. 지난 1월 17일 MBC ‘이브닝 뉴스터치’에선 박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던 이모씨를 가리켜 ‘무고녀’라고 지칭했다. 지난해 SBS ‘모닝와이드’는 20대 여성의 시신이 담긴 가방이 발견된 살인사건을 전하면서 ‘가방女 시신 용의자 숨진 채 발견’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TV 뉴스에서조차 이 같은 여성에 대한 비하와 차별 표현이 난무하면서 관련 심의 규정이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송출 이후에 이뤄지는 심의와 징계만으로는 기울어진 방송계 환경을 바꾸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진의 인권감수성이 담보돼야 성평등한 방송 프로그램도 탄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달 14일 방영된 TV조선 ‘이슈해결사 박대장’은 안철수 의원이 추진중인 ‘국민의당’에 합류한 여성 정치인을 ‘안철수의 여자’ 등으로 지칭했다. ⓒTV조선 화면 캡처
지난 달 14일 방영된 TV조선 ‘이슈해결사 박대장’은 안철수 의원이 추진중인 ‘국민의당’에 합류한 여성 정치인을 ‘안철수의 여자’ 등으로 지칭했다. ⓒTV조선 화면 캡처

예능 프로그램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여성혐오 표현은 뉴스보다 더 노골적이다.

SBS ‘K팝스타 시즌6 더 라스트 찬스’는 지난 2월 5일과 12일 10대 여성 출연진이 짧은 교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선정적인 춤을 추는 모습을 방송했다. 출연진 중 한 팀은 ‘나와 자고 싶나요’(Voulez-vous coucher avec moi)라는 가사가 포함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의견제시’라는 경징계를 내렸다.

JTBC ‘아는 형님’은 지난해 1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경고’ 징계를 받았다. 중징계에 해당하는 조처다. 여성 출연자 성적 대상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대사 등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징계를 받은 두 예능 프로그램의 또 다른 공통점은 남성 진행자와 패널로 출연진이 구성됐다는 점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성비 불균형은 고질적인 문제다. ‘PD저널’이 3월 초 KBS, MBC, SBS, JTBC, tvN 5개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와 고정 출연자의 성별 비율을 분석한 결과를 보도했다. 그 결과 전체 출연자 334명 중 여성은 74명으로 22.15%에 그쳤다. 출연자 10명 중 7명 이상은 남성이라는 얘기다.

 

여성 시청자 비율이 높은 드라마도 상황은 비슷하다. 서울YWCA가 지난해 각 방송사의 22개 드라마 모니터링 결과 드라마 속에서 남성은 주로 의사, 검사 등 전문직으로 등장한 반면, 여성은 판매사원, 아르바이트 등 비전문직으로 묘사됐다. 성역할 고정관념을 조장하거나 여성의 외무를 품평하는 성차별적 내용은 108건에 달한 반면, 성평등적 내용은 42건에 불과했다.

방송은 혐오표현을 경험하는 주요 경로로 지목되기도 한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내 최초로 소수자 혐오발언 피해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3.3%가 ‘방송’을 통해 혐오표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방송의 여성혐오와 성차별 표현이 지속되자 여성가족부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중 양성평등에 관한 조항(제30조)을 구체화하고 일부 조항을 신설했다. 여성가족부(장관 강은희)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효종)는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중 양성평등에 관한 조항(제30조)을 구체화하고 일부 조항을 신설했다.

심의 강화가 자칫 ‘표현의 자유’를 업악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작진이 프로그램 기획과 제작 단계부터 성차별과 혐오 표현을 막고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한다. 이를 위해 각 방송사 자체 제작 가이드라인을 정리해 ‘성평등한 방송 제작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해외에선 이미 성평등한 미디어 환경 조성을 위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활용해 효과를 보고 있다. 호주의 ‘여성 묘사 가이드 라인’, 영국의 ‘BBC 프로듀서를 위한 지침서’, 캐나다의 ‘텔레비전, 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한 성역할 묘사 코드’가 대표적이다.

최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양성평등문화 확산을 위한 프로그램 제작 가이드라인 개발’ 연구 보고서를 통해 PD와 방송작가, 전문가, 시민단체가 함께 만든 방송프로그램 제작 가이드라인을 제안했다.

연구원이 제시한 ‘양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 가이드라인’에는 △방송은 주제의 선정에서부터 양성평등이 적극 반영돼야 한다 △방송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균형 있게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방송은 성역할 고정관념에 치우치지 않는 여성과 남성의 다양한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방송은 어떠한 성적 폭력이나 가정폭력도 정당화하거나 선정적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방송에서는 성차별적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등 5개 항목이다.

연구를 총괄한 안상수 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이 가이드라인은 방송을 기획·제작·편성하는 모든 과정에서 방송사, 제작진, 출연자들이 꼭 점검하고 준수해야 할 핵심사항으로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에 맞춰 제안했다”며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방송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은 먼저 방송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양성평등한 시각과 관점에 공감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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