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대통령 파면과 두 개의 헤어롤
[기자의 눈] 대통령 파면과 두 개의 헤어롤
  • 이하나 기자
  • 승인 2017.03.14 19:04
  • 수정 2021-01-05 0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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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인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헤어롤을 풀지 못한채 출근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인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헤어롤을 풀지 못한채 출근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일인 지난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출근 모습이 화제가 됐다. 평소보다 1시간 일찍 헌재에 도착한 그의 뒷머리에 분홍색 헤어롤 두 개가 말려 있었기 때문이다. 헤어롤을 빼는 것도 잊고 출근할 만큼 탄핵심판에 몰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권한대행의 출근 모습이 담긴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자 누리꾼들은 “얼마나 바빴으면” “아름다운 실수” “헤어롤 2개를 합친 모습을 두고 ‘8대 0 만장일치’를 예고한 것 아니냐”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일하는 여성의 모습’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헤어롤 패러디도 이어졌다.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와 이 권한대행의 퇴임식에는 헤어롤을 만 시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헤어롤은 헌신적으로 일하는 여성의 상징처럼 됐다. AP통신은 “사람들은 헤어롤 해프닝을 이 대행이 판결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보여 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며 “한국의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투영된 한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에서는 코미디쇼에서 여성 외모를 가혹한 농담의 대상으로 삼고 체중을 조롱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면서 “그러나 이날 이 권한대행의 헤어롤을 웃음거리로 삼는 이들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이 권한대행의 모습은 미용사를 청와대로 불러 올림머리를 하는데 시간을 보냈던 박 전 대통령과 확연하게 대비된다. ‘여성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된 박 전 대통령에게 여성들은 헌신과 책임감을 기대했다. 생명과 상생, 포용성을 중시하는 ‘여성 리더십’을 보여주길 바라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재임 기간 제대로 된 성평등 정책을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한국 여성의 지위는 세계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후퇴하기만 했다. 오히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만 일으켰으며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여성성’을 방패삼아 자신의 무능을 가리려 해 여성들의 공분을 샀다.

헤어롤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과도한 관심에 조금은 불편하기도 하다. 일하는 여성 중엔 한두 번씩 비슷한 실수를 경험한다. 헤어롤을 그대로 만 채 출근하는 것은 다반사고, 구멍 난 스타킹을 그대로 신거나 양쪽에 색상이 다른 스타킹을 신는 경우도 있다. 모두 바쁘게 출근하다보니 생기는 해프닝이다.

화제가 된 이 권한대행의 출근 모습도 단순한 실수지만 ‘여성’ 헌법재판관이기에 더욱 많은 관심이 쏟아진 측면이 있다. 만약 남성 헌법재판관이 단추가 떨어진 양복을 입거나 바지 지퍼를 올리지 않았다면 ‘진짜 일하는 남자의 상징’이라고 칭찬 받았을까.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남편을 챙기지 않은 헌법재판관의 아내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이 권한대행의 헤어롤을 보면서 ‘남편은 바쁜 아내를 챙기지 않고 뭘 하고 있었느냐’고 따지지 않는다.

이번 촛불 정국에서 여성이 외모를 꾸미느라 업무에 소홀한 것 아니냐는 여성혐오적인 비판이 있었다. 이번 해프닝도 비슷한 맥락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헤어롤에 대한 과도한 칭찬이 외모보다 자기 일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개념있는 여성’을 향한 찬사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헤어롤 해프닝’에 대한 관심이 여성의 외모를 능력으로 연관 짓는 선입견을 깨는 중요한 터닝포인트라는 작은 기대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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