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나중에’, 박근혜의

‘배제’만큼 변화 의지 안 보여

 

촛불 계승 ‘페미니스트’ 대통령

되려면 젠더 트러블 감수해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6일 서울 을지로 페럼타워에서 ‘새로운 대한민국, 성평등으로 열겠습니다’를 주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7차 포럼에서 성평등 정책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6일 서울 을지로 페럼타워에서 ‘새로운 대한민국, 성평등으로 열겠습니다’를 주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7차 포럼에서 성평등 정책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단다. 다른 대선 후보들이 아예 젠더 이슈를 건드리지 않는데 비하면 이는 분명 용기 있는 결단이다. 그러나 뭔가 찜찜하다. 그의 페미니스트 선언에는 젠더 트러블을 감수할 의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페미니즘은 젠더 트러블의 역사였다. 1920~30년대 서구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바지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공·사 영역 구분에 기반한 젠더 이분법을 뒤흔들었다. 정신분석 페미니스트 뤼스 이리가레는 여성을 자족적 섹슈얼리티를 향유하는 두 입술의 섹스로 재구성해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나아가 퀴어 페미니스트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에는 원본이 없으며, 이성애자들도 알고 보면 한때 지독한 동성애자였음을 주장해 이성애 중심적 젠더 질서에 균열을 가했다. 이렇듯 페미니스트는 당대의 보편적 정서나 사회적 합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젠더 트러블 메이커였다.

박근혜의 ‘여성’ 대통령 선언이 페미니스트의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은 거기에 젠더 트러블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성애중심의 핵가족 젠더 질서를 변화시킬 의지가 전혀 없었다. 여성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부가 여성‘가족’부였고 여성 정책이 출산과 양육을 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게다가 여성가족부는 ‘gender equality’를 ‘성’ 평등이 아니라 ‘양성’ 평등으로 독해했다. 이는 오직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의 젠더만을 인정하는 가운데 성소수자들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배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어떠한가? ‘여성’ 대신 ‘페미니스트’를, ‘양성’평등 대신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 듯하다. 박근혜 정권이 성소수자 인권을 노골적으로 배제했다면 문재인 캠프는 이를 ‘나중’으로 미룰 뿐이다. 그는 성소수자 차별금지법을 따로 제정할 생각이 없으며, 나중에 사회적인 합의가 충분히 확보되면 다시 논의하겠다고 한다. 문재인의 ‘나중’은 박근혜의 ‘배제’만큼이나 변화의 의지가 없다. 그는 보수적 정서와 합의에 자신을 맞출 뿐이다.

그 역시 젠더 트러블의 의지가 없음은 그가 이성애 핵가족 제도 내의 여성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인센티브를 통해 남성의 양육을 유도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무가 아닌 선택이다. 유연근로제와 근무시간 단축 역시 여성들에게만 적용되는 특혜처럼 인식될 위험이 있으며, 여성들을 양육의 주된 책임자로 상정하는 환경을 지속시킬 확률이 높다. 결정적으로 그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출산이나 양육과 관련 없는 여성 인권을 단호하게 배제한다. 오늘날 뉴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호소했던 낙태죄 폐지의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16일 서울 을지로 페럼타워에서 ‘새로운 대한민국, 성평등으로 열겠습니다’를 주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7차 포럼에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성평등 정책 기조연설을 하는 동안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회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사실상 반대 의사를 내비친 문 전 대표와 청중을 규탄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16일 서울 을지로 페럼타워에서 ‘새로운 대한민국, 성평등으로 열겠습니다’를 주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7차 포럼에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성평등 정책 기조연설을 하는 동안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회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사실상 반대 의사를 내비친 문 전 대표와 청중을 규탄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대권 주자들은 어째서 촛불의 정신을 벌써 망각했는가? 페미니스트들이 촛불을 든 것은 박근혜 정권이 사실상 ‘아버지’ 박정희를 대변하는 가부장적 권력 카르텔임을 폭로하고 이를 해체시키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가부장적 젠더 질서의 해체적 재구성을 요구한다. 그러니 촛불을 계승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면 기꺼이 젠더 트러블을 감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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