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무작정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

직장 내 ‘맨스플레인’이 드러낸 젠더 불평등

‘OECD 1위’ 성별 임금격차·여성 리더 가뭄 원인

“노동 현장의 성평등 확산 위한 구조적  필요”

 

“박 대리, 다음 주에 상해로 출장 간다며? 기초 중국어 회화랑 여행 팁을 알려줄게....” “박 대리, 중국 클라이언트에게 메일을 보낼 땐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대기업 영업직에 종사하는 박나미(31) 씨는 남자 동료들의 “오지랖”에 오늘도 한숨을 쉰다. 중국어 전공자로, ‘명문대’로 꼽히는 중국 칭화대에서 유학 후 현지 인턴십까지 마친 박 씨다. 중국엔 가 본 적도 없다는 남자 상사는 그에게 “본토 발음이 아닌 걸 보니 중국어를 잘못 배운 것 같다. 좋은 과외 선생을 소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 부장, ‘포켓몬고’ 알아? 인기 일본 애니메이션을 게임으로 만든 건데....” “네, 과장님. 저 ‘포켓몬’ 세대예요. 포켓몬고도 해요.” “여자도 그런 게임을 해? 김 부장은 역시 독특해.” 김수현(34) 씨가 최근 남성 상사와 나눈 대화다. 부장급 이상 간부 중 홀로 여성인 그는, 남성 동료와 상사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들이 여성인 자신을 은근히 낮춰 보는 듯해 괴롭다. “김 부장은 다 좋은데 말이 많아. 군대 다녀왔으면 안 그럴 텐데....” “열심히 해서 승진해봐야 힘들 뿐이야.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돼.”

운동기구 영업 일을 하는 이지현(30) 씨도 남성 상사의 불필요한 조언에 시달리고 있다. “지현 씨, 런닝한다며? 무조건 뛴다고 살 안 빠져. 다이어트 하려면 땀복 입고 뛰어야 해.” “영업은 체력이야. 체력도 도전 정신도 기를 겸 열심히 운동해서 마라톤에도 도전해 봐.” 이 씨는 장거리 달리기 선수 경력 10년에, 각종 마라톤대회 풀코스와 하프코스를 100회 이상 완주 기록도 보유했다. 그러나 “회사 생활하며 만난 많은 남자들은 내 말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고, 나를 무작정 가르치려 든다”고 그는 말했다. 

 

분야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펼쳐지는 직장 내 ‘맨스플레인(Mansplain)’. 남성(man)이 여성에게 무턱대고 아는 척 설명(explain)하려 드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다. “과잉 확신과 무지함이 결합돼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이 말을 처음 사용한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설명한다. 여성의 입을 막고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남성들의 가르침’의 저변엔 “‘여자가 뭘 알아?’ ‘그래도 역시 남자가 더 잘 알지’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깔렸다. 솔닛은 “이는 거의 모든 여자들이 매일같이 치르는 전쟁으로, 자신이 잉여라는 생각과의 전쟁이자 침묵하라는 종용과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핵심은 직장 내 맨스플레인이 보편적인 현상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본질은 불평등한 젠더 권력관계라고 솔닛은 지적한다. 말할 권리, 공적 영역에서 신뢰를 얻을 권리의 문제다. 직장에서 여성을 무작정 가르치려 드는 남성들, 여성의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저평가되는 문제, 여성 리더 가뭄 현상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 2002년 이래로 줄곧 ‘OECD 성별 임금격차 1위’를 달리고, 국내 100대 기업 임원 중 여성은 40명 중 1명 수준에 불과(2016)한 현실도 이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직장 내 ‘약자’인 여성들이 맨스플레인에 개별적으로 대처하기란 어렵다. “남성 중심적이고 위계·통합을 중시하는 한국식 조직 문화 내에선 그냥 참고 버티는 게 더 편하다”고 여성들은 말했다. “부장이 된 이후에야 성차별적 발언에 항의하기 시작했다”는 김수현 씨는 “사과하는 남자들도 있지만, ‘까다롭다’, ‘싸가지 없다’, ‘팀워크가 부족하다’고 반발하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남자가 소신을 밝히면 ‘남자답고 씩씩한’데, 여성이 소신을 밝히면 ‘나댄다’고 하죠. 미팅할 때 제 의견을 당당히 말한다는 이유로 회사 사람들은 저를 ‘센 캐(강한 캐릭터)’ ‘터프걸’로 불러요. 그 말들의 부정적 뉘앙스를 모를 리가 없죠. 한국 기업 내 여성 리더가 드문 이유를 늘 실감하고 있어요.” 박나미 씨도 고충을 털어놓았다.

 

스웨덴 최대 노조 ‘우니오넨(Unionen)’이 지난해 11월 개설한 맨스플레인 핫라인. ⓒUnionen
스웨덴 최대 노조 ‘우니오넨(Unionen)’이 지난해 11월 개설한 맨스플레인 핫라인. ⓒUnionen

직장 내 맨스플레인을 해결하지 않고는 ‘성평등 노동’ 실현은커녕 유리천장도 깰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높아졌다. 지난해 11월 스웨덴에서 등장한 ‘맨스플레인 핫라인’(바로가기)이 주목받은 이유다. 스웨덴 최대 노조 ‘우니오넨(Unionen)’이 마련한 젠더 전문가와의 전화 상담 창구로, 직장 내 맨스플레인과 성차별을 저지르지 않기 위한 구체적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인식 변화 캠페인 차원에선 효과적이라는 평가다. ‘맨스플레인 핫라인이 왜 쓸데없는지’ 항의 차 전화한 이들도 많았지만, “적지 않은 남성들이 직장 내 성차별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맨스플레인은 “여성이 자신을 실제보다 덜 능력 있는 존재로 여기게 하고, 결국 여성들을 일터에서 사라지게 하”는, “무시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라고 우니오넨은 역설했다.  

박나미 씨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이 단시간에 전 세계의 화두로 떠오른 것은 차별과 폭력에 허우적대는 여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라고 했다. “1년에 몇 시간씩 의무 교육에 그치는 게 아니라, 기업이나 노조 차원에서 구체적인 노동 현장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성평등 교육과 캠페인을 벌일 때라고 봐요. 왜 여자들이 아우성치는지, 남자들도 좀 들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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