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프로그램 ‘특집’마다 

‘소개팅’ ‘미팅’ 자리 마련해

여성을 남성 연예인 위한

상 혹은 선물로 위치시키고

‘러브라인’ 위한 도구로 사용

 

지난해 12월 방송된 ‘김종민 특집’에서는 다양한 코너 중 하나로 소개팅 자리가 마련됐다. ⓒKBS2 ‘1박2일’ 방송영상 캡처
지난해 12월 방송된 ‘김종민 특집’에서는 다양한 코너 중 하나로 소개팅 자리가 마련됐다. ⓒKBS2 ‘1박2일’ 방송영상 캡처

예능프로그램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자면, 소개팅·러브라인은 빠지지 않는 단골소재였다. 여성과 남성 출연자가 유사 연인관계로 묶이면 매주 그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가 생성된다. 여자 출연진이 없는 프로그램에서는 ‘소개팅 특집’을 내세워 어떻게든 남자 연예인에게 여성을 붙여주곤 한다.

이른바 ‘러브라인’은 그간 예능 속 작은 드라마로 소비되며 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시청자들은 이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고 있다. 예능프로그램에서 반복되는 소개팅 콘셉트와 인위적인 러브라인은 여성을 남자를 위한 상 혹은 선물로 위치시키고, 성적 대상화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 1월 15일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런닝맨’과 지난해 12월 방송된 KBS2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는 방송인 김종국과 김종민의 소개팅 자리가 마련됐다. 각각은 ‘호랑이 장가보내기’ ‘한밤의 소개팅’이라는 주제로 꾸려졌다. 상대는 일반인이었고, 미모와 능력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특이점은 두 개의 프로그램이 남자 멤버를 내세운 특집에서 마치 짠 것처럼 ‘소개팅’이라는 소재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김종국의 경우 일방적인 하차 통보에 대한 사과와 위로차원에서 진행된 특집이었고, 김종민의 경우 9년간 꾸준히 함께해온 것에 대한 선물의 의미로 마련된 특집이었다.

 

지난 1월 15일 방송된 런닝맨 334회차에서는 ‘김종국 특집’이 마련됐다. 해당 편에서는 ‘호랑이 장가보내기’를 주제로 김종국을 위한 소개팅 자리가 꾸려졌다. ⓒSBS ‘런닝맨’ 방송영상 캡처
지난 1월 15일 방송된 런닝맨 334회차에서는 ‘김종국 특집’이 마련됐다. 해당 편에서는 ‘호랑이 장가보내기’를 주제로 김종국을 위한 소개팅 자리가 꾸려졌다. ⓒSBS ‘런닝맨’ 방송영상 캡처

‘소개팅 특집’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남자 연예인을 위한 상이나 선물로 자리한다. 동시에 그들은 남자 멤버의 잠재적 연애·결혼상대로 대상화되며 주체성을 잃게 된다. “우리 OO이 장가가야지”라며 소개팅 특집의 주인공을 결혼시키기 위해 똘똘 뭉친 멤버들과 제작진에 의해 여성은 소개팅을 위한 일회성 도구로 사용된다.

“너희 좋은 대학만 가봐라. 예쁜 여자들이 줄을 설 거다!” 학창시절 남학생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말이다. 기나긴 공부 레이스에 지친 학생들에게는 한 번쯤 목을 축여주는 단비와 같은 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성의 시각에서 봤을 때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 → 좋은 대학을 간다 → 예쁜 여자들이 따른다’ 이 논리구조에서 여성은 ‘명문대생’(남)에게 따라붙는 보상품일 뿐이다. 이 구조 안에선 ‘여성도 명문대학에 갈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가 사라져버린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하고 주체성이 지워진다. 이처럼 여자를 남성을 위한 보상품이나 트로피로 여기는 가부장제 인식은 미디어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예능프로그램이 이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상대방의 의사나 기분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며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엄연히 폭력이다. 하지만 예능에서 이는 애절한 로맨스로 그려지며 구애활동을 펼치는 남성에게는 ‘상남자’ ‘박력 고백’이라는 타이틀이 하사된다.

KBS2 ‘해피투게더3’에 출연 중인 웹툰작가 기안84(김희민)는 지난해 10월 첫 출연부터 MC 엄현경을 향해 이성적 관심을 드러냈다. “남자친구 있느냐”라는 질문이 시작이었다. “분당 놀러와라” “(엄현경에게) 차이면 이제 여기 안 올 거다” “꿈에 엄현경이 나왔는데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해 깨고 나서 우울했다” 등으로 이어지는 발언은 분명히 엄현경에 대한 성적 호감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심지어 지난 1월 “엄현경씨가 여동생이면 어떨 것 같으냐”는 유재석의 질문에 기안84는 “제 친여동생이면요? 그럼 제가 좋아할 것 같은데요. 부적절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발언에 시청자들은 “혐오스럽다” “대체 그런 말을 왜 하는 것이냐” “엄현경 굉장히 스트레스 받을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웹툰작가 기안84는 MC 엄현경에 지속적으로 이성적 호감을 표하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KBS2 ‘해피투게더3’ 방송영상 캡처
웹툰작가 기안84는 MC 엄현경에 지속적으로 이성적 호감을 표하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KBS2 ‘해피투게더3’ 방송영상 캡처

 

기안84 주위의 남자 MC들은 그에게 계속해서 엄현경에게 구애할 기회를 준다. 그 속에서 엄현경의 의견이나 기분은 고려되지 않는다. ⓒKBS2 ‘해피투게더3’ 방송영상 캡처
기안84 주위의 남자 MC들은 그에게 계속해서 엄현경에게 구애할 기회를 준다. 그 속에서 엄현경의 의견이나 기분은 고려되지 않는다. ⓒKBS2 ‘해피투게더3’ 방송영상 캡처

엄현경은 그간 “잘생긴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솔직하게 밝혀왔다. 하지만 유재석과 전현무를 비롯한 주위 남성 MC들은 엄현경의 의견이나 취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기안84의 마음을 받아들여주기를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 “기안84가 이렇게 너를 좋아하는데 좀 받아줘라”는 식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안84도 그 분위기에 편승하며 함께 즐기는 듯하다. 하지만 여자도 개인의 취향과 생각, 기분이라는 것을 가진 존재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구애하며 노력을 들였으니 알아주라”는 식의 고백은 그저 추근거림일 뿐이다.

남자 MC들의 집단적인 ‘러브라인 몰이’는 엄현경을 ‘연애 대상’ ‘구애받는 대상’으로 위치시켜 그의 입을 막아버린다. 유재석이 두 발 벗고 나서 기안84의 마음을 옹호해주는 상황에서 나이 어린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나 될까. 그저 웃음으로 넘기는 것이 엄현경에겐 최선일 것이다.  

트위터리안 @Gise*****은 “유재석이 출연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고정멤버와 여자연예인 혹은 일반인 여성을 등장시켜 연애라인으로 묶는 게 유재석의 취향이고 유재석의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다”라며 “런닝맨에서도 특집이라고 김종국 소개팅 특집을 했다(던데)”라고 꼬집었다.

예능프로그램에서 남자 멤버에게 소개팅 자리를 마련해주고 연애·결혼 대상을 점찍어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슬아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이는 여성을 남성을 위한 보상품 쯤으로 여기고, 여성을 상이나 벌로서 위치시키는 것”이라며 “유재석이든 누구든간에 방송에서 남녀를 짝짓기하고 연애관계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적인 부분”이라고 꼬집었다. 짝짓기 과정에서 남녀 각자의 취향이나 의견은 존중되지 않고, 특히 여성은 러브라인의 도구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주체성이 사라진다는 지적이다.

정 사무국장은 “한국사회에는 결혼을 장려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소개팅이라는 소재가 시청자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해왔다”면서 “하지만 이제는 상이나 선물로서 여성을 위치시키는 것이 ‘재미없음’으로 통용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시청자들은 소개팅이나 러브라인 등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세팅되는 프로그램에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비치고 있다.

정 사무국장은 “방송가는 연애, 짝짓기, 러브라인을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참신한 소재를 찾아야 한다”며 “방송계 종사자들은 콘텐츠를 만드는 입장에서 어떤 문화를 이끌어갈 것인지, 어떤 방향성 아래서 움직일 것인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현재 방송계는 이전에 해왔던 방식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며 기존의 것에 머무르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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