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타고 #OO계_내_성폭력에 대한 무수한 고발과 분노, 사과와 자성이 이어진 후 수개월이 흘렀습니다. 빠르게 밀려와 사라지는 SNS상의 언어들처럼 많은 이들의 용감한 말하기도 조금씩 잊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변화했을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자 분투하고 있을까요?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각계의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편집자주>

 

11월 3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스페이스 2012에서 열린 찍는 페미의 첫 모임 현장.
11월 3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스페이스 2012에서 열린 '찍는 페미'의 첫 모임 현장. ⓒ신희주 님 제공
 

“내 주변에 영화인을 꿈꿨으며 실제로 종사했던 언니들은 정말 유능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다른 일을 한다. 영화 일이 힘들고 박봉이니 그럴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이유지만 내가 그들에게 들은 성폭력 사례들은 '여자'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공포였다.”

지난해 10월21일 박효선 감독의 트윗으로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시작됐다. 이날만 여성 40여 명이 영화계 성폭력에 대한 말들을 쏟아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발로 뛰며 면접을 보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편집실에 갇혀 기나긴 작업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영화를 만드는 모든 과정마다 영화계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를 향한 성폭력이 존재했다. 상업 영화 제작 현장뿐만이 아니라 독립 영화 제작 현장, 영화와 영상을 가르치는 대학 그리고 입시 과정에서까지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었고, 미래의 ‘영화인’을 꿈꾸는 여성들은 여전히 노골적인 성차별을 감내해야만 했다.

해시태그가 나온 바로 다음 날, 김꽃비 배우의 제안으로 페이스북 그룹 ‘찍는 페미’가 개설됐다. 찍는 페미의 블로그(http://shootingfemi2016.blogspot.kr)에는 해시태그를 통해 나온 증언과 고발이 기록됐다. 핵심은 하나였다. 여성이 영화계 내에서 겪은 성폭력은 여성의 노동을 터부시하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며, 여성 대상 강력범죄를 소재로 손쉽게 선택하는 한국 영화계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카메라와 조명을 다룰 줄 모른다’는 편견은 여성 스태프를 동등한 노동자로 여기지 않고 성희롱 대상으로 삼는 폭력성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을 강간하고 난도질하는 영화 촬영장에서 일하는 여성 스태프의 인권은 그 영화의 젠더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영화계에는 여성을 억압하고 배제하고 멋대로 규정하고, 만연한 성차별과 성범죄가 제대로 가시화되기도 어려울 정도의 여성혐오가 공기처럼 떠돈다. 

그 유독가스를 인식한 영화계의 페미니스트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찍는 페미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는 많은 논의가 진행됐다. 여성혐오적 시나리오에 대응하는 방식, 남성 중심적인 프로덕션 중 여성 배우들이 겪은 여성혐오 사례들, 영화계 내 성폭력 반대 운동의 방식, 여배우와 여류라는 용어의 여성혐오, 한국 영화 속 여성의 몸에 대한 제약, 촬영장 내 한국식 호칭에 대한 고민과 대안, 영화계 내 성폭력을 취재하는 언론에 대한 비판, 일본 영화의 여성혐오적 타이틀 번역, 여성혐오적인 방송계에 대한 비판 등이었다.

영화 ‘걷기왕’의 전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해 주목받았던 남순아 감독은 해당 교육이 유급교육임을 알렸고, 2007년 노조협약을 통해 성희롱 예방교육 시행을 이끈 전국영화산업노조 가입을 권유했다. 페미니즘 영화·다큐멘터리 추천, 캠퍼스 페미니즘 영화제 시간표 공유, 스태프 공개 모집 등 정보 공유도 활발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내 대자보 ‘씨스탠드 조금 든다고 욕하던 영남이에게’ 내용도 공유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페미니스트들은 김윤석 배우의 성희롱 발언,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식 공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여배우’는 여성혐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배우 이주영을 응원했다. 

열정은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어졌다. 지난달 3일 망원동 스페이스 2012에서 열린 첫 모임엔 55명의 회원이 오후 5시부터 밤 10시15분까지 거의 쉬지 않고 발제와 회의를 진행했다. 자신이 겪은 영화계 내 성폭력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용감한 페미니스트들이 참여했고, 모든 발언은 큰 박수를 받았다. 모두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매우 컸고, 페미니즘 콘텐츠를 위한 성평등 테스트·가이드라인, 프로덕션 매뉴얼과 영화 제작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페미니즘과 영화를 둘러싼 창작과 비평, 상영, 반성폭력 운동 등 찍는 페미가 갈 수 있는 길, 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1월 3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스페이스 2012에서 열린 찍는 페미의 첫 모임 현장. 55명의 회원이 참석해 오후 5시부터 밤 10시15분까지 발제와 회의를 진행했다.
11월 3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스페이스 2012에서 열린 '찍는 페미'의 첫 모임 현장. 55명의 회원이 참석해 오후 5시부터 밤 10시15분까지 발제와 회의를 진행했다. ⓒ신희주 님 제공

이후에도 여성들은 다양한 영화계 내 성폭력 사례를 공론화했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프로덕션 중 저지른 성폭력 가해,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감독의 잘못된 연출 방식, 그리고 이에 대한 김도훈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 편집장의 발언 논란, 이주영 배우에 대한 김의성 배우의 트윗 논란 등이었다. ‘찍는 페미’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조직적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논의 중이다. 

영화계의 응답도 점점 구체화하는 중이다. 지난달 6일 서울독립영화제에선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 위원회가 기획한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 영화계 성평등 환경을 위한 대안 모색’이 열렸다. 행사 이후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의 적극적인 연대 표명으로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 운동의 든든한 동료가 생겼다. 여성영화인모임은 올해 사업으로 추진할 영화계 내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상설 기구를 영화계 전반의 여성을 위해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 위원회와 함께 논의해 영화계 내 성폭력에 관련한 요구사항을 영화진흥위원회에 전달하기로 했다.

영화잡지 ‘세컨드’의 편집진도 적극적으로 연대 의사를 밝혔고 내년에 함께 정기 영화 상영회를 열게 되었다. 씨네 21은 여성 기자들이 주축이 돼 영화계 내 성폭력에 대한 취재와 대담을 진행하고 있다. 맥스무비, 무비스트 등 영화 매체의 여성 기자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활약 중이다 이윤정, 강유가람, 김보라 등 영화 제작 경험이 많은 여성영화인들과의 연대도 무척 든든하다. 찍는 페미는 올해도 여러 행사에서 발언 제의를 받았다. 느리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며, 찍는 페미 활동가들이 지치지 않고 변화의 맥을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한 여성 PD로부터 “찍는 페미가 도대체 왜 필요한 거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는 여성이 주인공이며 여성의 싸움과 승리를 생생하게 그린 영화를, 여성 스태프들과 보다 윤리적인 촬영 현장에서 만들고 싶다. 연출부 막내가 헤드 스탭 회의를 기록하면서 ‘감히’ 의견을 내지 못하거나, 스타일리스트가 배우의 과시용 트로피가 되거나, 촬영감독이 슬레이트를 치는 스태프를 아무렇지 않게 희롱하는 현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

굳이 ‘사교성’을 드러내지 않고도 자신의 소임을 수행하고 합리적인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수평한 관계에서 모든 스태프 간 막힘없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 촬영 시간이 지연된 상황에서도 이 앵글이 과연 윤리적인 것인지 따질 수 있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 쉬는 시간에 술을 마시는 것보다 다 함께 영화를 보는 일을 반기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 크랭크 업한 날마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피로한 몸을 뒤척이며 혼자 고민에 빠졌던 시간을 더는 겪고 싶지 않다. 찍는 페미가 여성의 영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되길 바란다. 나아가 영화의 구시대적인 비윤리성에 종말을 고하는 선구자들이 되길 바란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