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는 올해 한국인 최초로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해 여성 소설가의 저력을 보여줬고, 리우올림픽에선 장혜진, 박인비 등 여성 스포츠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의 수상은 한국인에게 큰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반면 여성혐오로 얼룩진 한국사회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도 있었다. 지난 5월 강남역에서 일어난 여성 살해 사건은 많은 여성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우리사회의 ‘여혐’을 일깨우는 사건이 됐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각성한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며 실천하고 있다. 올 한해를 장식한 여성인물들을 통해 2016년을 되돌아본다.

 

고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씨. ⓒ뉴시스·여성신문
고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씨. ⓒ뉴시스·여성신문

국가폭력 희생자 고 백남기 농민의 딸 도라지씨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끝내 숨진 백남기 농민은 민중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백도라지씨,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이름의 백민주화씨 등 두 딸을 뒀다. 두 딸은 매일 아버지가 입원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을 찾아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아버지를 보살폈다. 백씨는 317일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지난 9월 세상을 떠났다.

백씨가 사망하기까지 검찰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경찰은 ‘사인 규명’을 핑계로 부검 영장을 신청해 파문이 일었다. 또 백씨가 입원한 서울대병원과 주치의 백선하 교수는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사망했다는 진단서로 사인 규명의 근거를 내놔 거센 비난을 받았다.

큰딸 도라지씨는 1년만에 부친의 장례를 치른 후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이라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 이어 “강신명 전 경찰청장과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을 비롯한 국가폭력의 책임자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이들은 살인미수죄가 아니라 살인죄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라고 강조했다. 도라지씨는 정치권, 시민단체들과 함께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리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기나긴 싸움에 돌입한 상태다.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소녀들을 기억하는 숲 in 난징’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은 길원옥 할머니. ⓒ뉴시스·여성신문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소녀들을 기억하는 숲 in 난징’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은 길원옥 할머니. ⓒ뉴시스·여성신문

12·28 한일합의 무효화 운동 벌인 ‘위안부’ 할머니들

지난 3월, 위안부 할머니 29명과 사망한 할머니 8명은 12·28 합의에 대해서 헌법소원을 제출했고, 이후 계속해서 언론에 위안부 합의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견지해왔다.

김복동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지난 6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일 모레면 죽을 할머니들이 무슨 재단이 필요한가"라면서 "재단 없이도 잘 살아왔다"고 밝혔다. 정대협 등 시민단체와 학계는 지난해 12·28 합의에 기반을 두고 정부가 설립하는 ‘화해와 치유재단’에 반대해 지난 6월 ‘일본군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정의기억재단)’을 설립했다. 

할머니들은 20여년간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일본 정부에 사과를 받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 쏟았다. 그 중 하나가 세계 여러 피해자들과 연대를 맺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피해를 알리는 소녀상 건립을 추진해온 것이다. 최근에는 미국 워싱턴에 세워질 소녀상을 공개했다.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때문에 아직 건립 장소는 확정되지 않았다. 평화의 소녀상은 올해 인천, 안성을 비롯해 호주, 중국 등 외국에 세워지며 현재 국내외에 30여개 넘게 존재한다.

올해는 특히 고령의 할머니들이 세상을 뜨면서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사죄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지난 6일 경남 남해에 살던 박숙이 할머니가 별세해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39명으로 줄었다.

 

14개 여성단체가 지난 10월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형법상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 시위’를 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14개 여성단체가 지난 10월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형법상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검은 시위’를 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2016 페미니즘 이끈 2030 뉴페미니스트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사회의 만연한 여성혐오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2030 여성들의 인식은 변화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은 다시 활발하게 이야기됐다.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꾸준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뉴페미니스트들 덕에 페미니즘은 뜨거운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2030 페미니스트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5·17 강남역 페미사이드 이후 사건을 기억하고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페미니즘 그룹 강남역 10번출구,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등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해 페미니즘 이슈를 공론화했다. 오프라인에서도 다양한 행동을 벌이며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있다.

공론장에서 여성의 경험과 차별 이야기하기, 밤길 걷기, 낙태죄 폐지 시위 등은 이들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목소리는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서도 두드러졌다. 페미존을 구성해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경험, 집회 내 성희롱·성추행, “여성혐오는 민주주의와 함께 갈 수 없다”는 당당한 외침 등 다양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쏟아놓았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페미니즘 행보를 이어가는 2030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을 이루고 있다.

 

한강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강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강, 『채식주의자』로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

한강(46)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상을 받았다. 『채식주의자』는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68만부가 판매됐으며, 올해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한국문학을 견인했다. 미국 뉴욕타임스 선정 ‘2016년 최고의 책 10권’에 포함되기도 했다.

『채식주의자』는 각각의 세 중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을 묶은 연작 장편 소설이다. 극단적 채식주의에 빠진 여주인공 영혜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각각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에서 그렸다.

한강 작가는 본보 인터뷰에서 “인간은 왜 이렇게 폭력적 존재인가, 폭력을 거부할 수는 없는가. 이런 질문이 『채식주의자』를 낳았다”고 말했다. 한승원 소설가의 외동딸인 그는 70년대생 문인 중 처음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일찍부터 ‘차세대 한국문학의 기수 중 한 명’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예능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김숙.
예능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김숙.

개그우먼 김숙이 보여준 가부장제 미러링과 ‘걸크러시’

“남자가 조신하니 살림 좀 해야지.”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가상결혼을 소재로 한 JTBC 예능 프로그램 ‘님과 함께2-최고의 사랑’ 등 여러 방송을 통해 가부장을 미러링한 ‘가모장’ 캐릭터로 ‘걸크러시’의 아이콘이 된 개그우먼 김숙. 기존 성역할을 허물고 가부장제의 불합리를 드러내며 인기를 얻은 ‘김숙 현상’을 페미니즘 맥락에서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손희정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은 『여/성이론』(여이연) 여름호를 통해 “김숙이 미러링하는 것은 정확하게 한국의 가부장제”라고 말했다. 심혜경 천안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도 젠더 시스템을 뒤흔드는 김숙의 말솜씨는 “2016년 한국을 살아내는 대중문화 엔터테이너의 유연한 페미니스트 전략임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김숙의 발언은 부조리한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에 억압당한 여성들의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로 떠오르며 한국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현상으로 주목받았다.

 

리우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 대표팀 장혜진(왼쪽부터), 최미선, 기보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리우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 대표팀 장혜진(왼쪽부터), 최미선, 기보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리우올림픽 빛낸 장혜진·기보배·최미선·윤진희

한국은 지난 8월 열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최종 8위 기록을 세웠다. 한국이 획득한 금메달 9개 중 5개를 여성 선수들이 획득하는 등 여성의 활약이 빛난 올림픽이었다.

여자 양궁 ‘원더우먼 3인방’ 장혜진(29·LH), 기보배(28·광주시청), 최미선(20·광주여대)은 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8연패의 역사를 썼다.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역도 여자 53㎏급에서 합계 199㎏(인상 88㎏, 용상 111㎏)을 들어올려 동메달을 받은 윤진희(30·경북개발공사) 선수는 ‘주부 역사(力士)’로 감동의 드라마를 쓴 주인공이다.

생애 처음 출전한 올림픽 양궁에서 2관왕을 차지한 장혜진은 ‘2016 대한민국 여성체육대상’ 최고상인 윤곡여성체육대상을 받으며 올해를 빛낸 최고의 여성체육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장혜진은 “올림픽 정상에 섰고 여성체육인으로 대상도 받았지만 안주하지 않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골든 그랜드슬램 달성 기념메달’ 출시 포토세션에 참가한 박인비 선수. ⓒ뉴시스·여성신문
‘골든 그랜드슬램 달성 기념메달’ 출시 포토세션에 참가한 박인비 선수. ⓒ뉴시스·여성신문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 골프여제 박인비

박인비는 올해 리우 올림픽 여자골프에서 금메달을 따내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올림픽 금메달과 메이저 4개 대회서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116년 만에 올림픽 종목으로 부활한 여자골프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미국 언론도 당시 박인비의 기록에 찬사를 보냈다. 미국 골프전문매체 골프채널은 “박인비는 심한 왼손 엄지 인대 부상을 안고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며 “올해 (남녀를 통틀어) 골프에서 가장 말도 안 되는 성과”라고 평가했다. 박인비는 손가락 부상으로 올림픽 출전 자체가 힘들었는데도 역경을 딛고 메달을 따내 한국 여자골프의 명성을 보여줬다.

이로써 박인비는 세계 골프 역사상 첫 골든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박인비는 지난해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바 있으며, 지난 6월 LPG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7세의 나이로 입회해 ‘최연소 입회’로도 주목을 받았다. 한국선수로는 박세리에 이어 두 번째이며, LPGA 전체로는 25번째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당선인 인수팀장에 임명된 강경화씨. ⓒ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당선인 인수팀장에 임명된 강경화씨. ⓒ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강경화씨,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당선인 인수팀장 임명

올 한해 국제무대에선 내년 1월 9대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하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총장의 인수팀장에 기용된 강경화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사무차장보의 활동이 돋보였다.

강 사무차장보는 한국 여성 중 유엔 기구에 진출한 최고위직 여성이며, 2013년 3월부터 전 세계의 재난에 대처하는 유엔 산하기구인 OCHA에서 일해왔다.

KBS 영어방송 PD 겸 아나운서 출신의 그는 세종대 영어영문학과 조교수, 국회의장 국제담당 비서관을 거쳐 비외무고시 출신이라는 약점을 딛고 외교부 국제전문가로 발탁됐다.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외교통상부 장관 보좌관(3급)으로 특채됐으며, 2005년 국제기구국장(당시 국제기구정책관)이 될 때는 외교부에서 두 번째 여성국장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유엔여성지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그는 2006년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OHCHR) 부판무관에 올랐고, 2011년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로 활동하는 등 유엔에서 줄곧 활동해왔다.

 

지난 4월 14일 서울 강남구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후보 사무실에서 4·13 선거 개표방송 결과를 지켜보던 전 후보와 지지자들이 당선이 유력해지자 환호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 4월 14일 서울 강남구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후보 사무실에서 4·13 선거 개표방송 결과를 지켜보던 전 후보와 지지자들이 당선이 유력해지자 환호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4․13 총선 ‘험지 생환’한 강남을 전현희

지난 4․13 총선에선 여당 텃밭인 서울 강남을에 야당의 깃발을 꽂은 전현희(51)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이 큰 화제를 낳았다. 18대 비례 초선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대 때 강남을 경선에서 패한 후 다른 지역에 전략공천 하겠다는 당의 제안을 사양하고 불출마했다. 강남을을 향한 외사랑을 4년 만에 쟁취한 것이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총선 최대의 승리는 비례 초선으로 강남을 접수한 전현희”라고 트위터에 올렸을 만큼 그의 당선은 이변이었다.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이유다.

 

한성숙 네이버 서비스 총괄부사장. ⓒ뉴시스·여성신문
한성숙 네이버 서비스 총괄부사장. ⓒ뉴시스·여성신문

거대 IT 기업 네이버 수장 한성숙 차기 대표

한성숙 네이버 서비스 총괄부사장은 지난 10월 네이버의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됐다. 한 부 사장은 내년 3월 열리는 주주총회 승인과 이사회 결의를 거쳐 차기 대표이사로 최종 선임된다. 한 부사장이 정식 취임하면 국내 인터넷업계의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하게 된다. 한국사회의 강력한 유리천장을 뚫고 IT업계 중에서도 공룡 기업이라 불리는 네이버 수장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국내 인터넷 산업 초기부터 다양한 경험과 역량을 쌓아온 그는 신임 대표이사로 충분한 실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중 대다수의 킬러 콘텐츠가 한 부사장의 손을 거친 작품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챙기는 그의 꼼꼼함과 세심함은 유용한 무기가 됐고, 네이버 전반의 다양한 서비스에 대한 높은 이해도는 큰 장점으로 꼽힌다. 남초 성향이 강한 IT 업계에서 최고 임원직을 여성이 맡게 된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고, 시사할 만한 점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