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골프의 개척자

27년 선수생활 마감

지도자로 첫 참가한

리우올림픽 금 감동

 

‘선수 박세리’로서는 필드와 작별을 고했지만 그는 이제 필드를 떠난 ‘골프 여왕’으로 서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발로 뛰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선수 박세리’로서는 필드와 작별을 고했지만 그는 이제 필드를 떠난 ‘골프 여왕’으로 서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발로 뛰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골프 여왕’ ‘한국골프 역사의 개척자’ ‘한국골프의 살아있는 전설’. 이토록 화려한 수식어가 어울리는 단 한 사람, 바로 박세리(39)다. 뛰어난 실력으로 골프 붐을 이끌고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깊은 시름에 빠진 국민을 위로하고 희망을 선물한 그가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지난 10월 은퇴식을 가졌다. 늘 현역일 것만 같던 그가 필드를 떠나는 모습에 팬뿐만 아니라 경쟁자였던 동료들도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그동안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 한 문장 에 27년간의 골프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인터뷰 직후 예정된 화보 촬영 때문에 미용실에서 만난 박세리 감독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화장을 받는 중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옆 자리에 앉자, 그는 “미안하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TV 속에서 늘 마주하던 운동복을 입고 모자를 쓴 모습 대신 화사한 블라우스와 정장 바지 차림은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우승 직후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특유의 미소만큼은 그대로였다.

지난 8월 선수에서 지도자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116년 만에 부활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골프 종목에서 여자골프 감독으로 박인비 선수의 금메달을 일궈냈다. 이 공로로 2016 대한민국 여성체육대상 여성체육지도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박 감독은 여성 지도자상 수상 소식에 “선수로서는 수차례 상을 받았지만 지도자로서는 처음 받는 상이어서 더 의미 있고 영광스럽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데 지도자상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제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과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응원을 받는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1989년 처음 골프채를 잡다

박 감독은 대전 유성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박준철씨 권유로 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원래는 육상 선수였다. 소년체전에 단거리와 중거리 선수로 출전하는 등 운동에 천부적인 능력을 보였다. 아버지는 운동에 소질을 보이는 딸의 손을 잡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골프 선수 생활을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다. 중·고교시절부터 ‘프로 잡는 아마’로 유명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92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첫 승을 올렸고 고3이던 1995년에는 KLPGA투어 12개 대회에서 4승을 올렸다.

‘한국 골프의 살아있는 전설’ 뒤에는 ‘골프 대디’의 열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빼놓기는 힘들다. 박 감독에게 아버지는 ‘영원한 스승’이다. 특히 아버지가 정신력 강화를 위해 공동묘지에서 담력을 키워야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일화지만 박 감독은 “와전된 얘기”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루 종일 연습하다 집에 가려면 깜깜한 산속 길을 걸어야 했고, 무덤을 지나친 적이 있었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이제 그에게 누구보다 다정한 친구 같은 존재다.

 

박세리 프로필 및 LPGA 투어 우승 일지 ⓒ뉴시스
박세리 프로필 및 LPGA 투어 우승 일지 ⓒ뉴시스

1998년 ‘맨발 샷’으로 희망 선물

프로 전향 뒤엔 더 거칠 것이 없었다. 1996년 국내에서 4승을 거둬 상금왕에 오른 그는 1997년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퀄리파잉스쿨을 수석으로 통과한 뒤 1998년 LPGA 투어에 데뷔했다. LPGA 진출 이후엔 한걸음씩 역사를 쌓아갔다. 신인이던 그해 맥도널드LPGA챔피언십 우승을 시작으로 LPGA 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을 제패하며 신인상에 올랐다. LPGA 투어에서 첫 우승과 두 번째 우승을 모두 메이저 트로피로 장식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2010년 벨마이크로 챔피언십까지 19년 동안 메이저대회 5승을 포함해 통산 25승을 거뒀다. 통산 상금 1000만달러를 넘어선 한국인 최초의 프로골퍼로도 기록됐다. 2007년에는 한국을 넘어 세계 여자골프에도 이정표를 남겼다. 2007년 한국은 물론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한국 골프사는 박세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그가 보여준 ‘맨발 샷’ 투혼은 소수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골프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골프는 박세리가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최종 라운드 18번홀에서 맨발로 워터 해저드에 들어가 맨발로 공을 쳐내 우승하는 감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우승한 뒤 국민 스포츠 반열에 올랐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른바 ‘맨발 투혼’으로 그는 ‘국민 영웅’이 됐다.

특히 그의 활약을 보고 수많은 ‘세리 키즈’가 탄생했고 오늘날 한국 여자골프의 신화를 만들었다. 지난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인비 선수의 경우,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8년 박 감독이 US여자오픈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 골프에 대한 꿈을 키워 ‘골프 여제’로 등극했다. 최나연, 김인경, 신지애, 유소연 등 스타급 플레이어들도 모두 그를 롤모델로 삼아 골프를 시작했다. 박 감독은 “제 개인적인 꿈 골프를 시작하고 꿈을 이루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저를 보고 골프를 시작한 선수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러우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극심한 슬럼프가 있었다. 2005년 최악의 부진으로 골프를 관둘 위기를 맞았다. “그러다 손목 부상이 찾아와 아예 쉬었던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골프장을 떠나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맥주도 한잔하면서 차츰 나를 돌아보게 됐다. 너무 한 가지만 바라보고 달려온 내 자신이 미련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활에 여유를 찾으면서 서서히 몸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박세리가 13일 인천의 영종도에 위치한 스카이72 오션코스에서 열린 2016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경기 18번홀 그린을 오르며 손인사를 하고 있다. ⓒ하나금융그룹
박세리가 13일 인천의 영종도에 위치한 스카이72 오션코스에서 열린 2016 LPGA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경기 18번홀 그린을 오르며 손인사를 하고 있다. ⓒ하나금융그룹

2016년 제2의 인생을 꿈꾸다

지난 8월에는 골프인생의 화려한 마침표를 찍었다. 박인비, 김세영, 전인지, 양희영을 이끌고 지도자로서 116년 만에 부활한 올림픽 무대에 섰다. 박인비 선수의 금메달 획득으로 또 한 번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당시 박 감독은 엄격하면서도 세심히 후배들을 챙기는 ‘여성 리더십’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리우올림픽 기간 선수들의 개별 인터뷰를 통제했고 개성이 강한 선수들을 합숙하게 했다. 경기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무서운 감독님’은 숙소 안에서는 언니처럼 동생 같은 후배들을 살뜰히 돌봤다. 직접 마트에서 장을 봐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을 요리했고, 매일 마트에서 신선한 과일을 사서 날랐다. 그는 “선수 시절 관리를 받은 대로 후배들에게 해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세계 여자골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박 감독은 지난 10월 인천 영종도 스카이72골프장에서 열린 LPGA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경기를 마치고 은퇴식을 가졌다. 이날 그는 18번홀 마지막 퍼트를 마친 후 끝내 참았던 눈물을 그린 위에 떨궜다. 박 감독은 “더 많은 시간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도 있었고, 골프는 제가 너무 사랑하고 좋아한 제 인생의 전부였는데 이제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감정 때문에 눈물을 보였다. 저한텐 너무 큰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선수 박세리’로서는 필드와 작별을 고했지만 그는 이제 필드를 떠난 ‘골프 여왕’으로 한국 골프를 위해 더 많을 일을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앞으로 한국 골프의 미래를 책임질 유망주를 발굴해 키우는 지도자의 길을 밟아 나갈 계획이다. 박 감독의 활약으로 체계적인 주니어 육성 프로그램이 도입됐고 국내 투어도 활성화됐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개선될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박 감독은 “한국 선수들의 훈련 여건은 역설적으로 후배들을 강하게 키우는 데 도움은 됐지만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서 “선수들이 훈련하고 경기를 하는데 있어서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다. 조금씩 변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이어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발로 뛰고 싶다”며 “운동 선수들이 편하게 운동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갖춰진 장소를 만들어서 선수들이 마음껏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목표”라는 바람을 밝혔다.

1990년대 후반 야구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박찬호 선수는 박 감독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너와 난 나무다. 열매였던 적이 없다”고. 그의 말대로 ‘박세리’라는 세 글자는 많은 후배들에게 열매가 됐고, 그 열매를 따 먹은 사람들은 이제 또 다른 씨앗을 뿌리고 있다. 제2의 인생을 연 박 세리는 또 어떤 나무가 돼 열매를 맺을지 기대가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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